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사법농단 사태의 긍정적 효과

이재용 사회부 차장




지난 11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거래 및 개입,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등 양 전 대법원장이 받는 혐의만 47개에 이른다.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도 같은 날 불구속 기소됐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최고위 판사인 대법관이 함께 기소된 것은 사법부 71년 역사상 최고의 치욕이라 할 만하다. 검찰이 전직 사법부 수뇌부를 기소하면서 이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이런 가운데 법조계에서는 판결 결과를 떠나 이번 사태가 사법부에 불러올 변화의 바람에 주목하고 있다. 일선 판사들이 이번 수사를 겪으면서 이른바 먼지털기·별건수사, 피의자 압박, 피의사실 공표 등 검찰의 무리한 특수수사 관행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간 검찰의 영장청구서나 신문조서 등을 근거로 판단을 내리던 판사들이 직접 압수수색을 당하고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검찰의 민낯을 보게 된 것이다. 사법농단 사태로 검찰에 피의자 또는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된 전현직 판사는 100명을 훌쩍 넘는다.


먼저 법원이 별다른 고민 없이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해주던 관행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최근 5년간 법원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90%에 이른다. 지난해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이 잇달아 기각하던 시점에 한 현직 법원장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우리의 주거·스마트폰·계좌 등만 중요한 게 아니라 장삼이사의 주거·계좌 등도 함부로 털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검찰을 무소불위의 빅브러더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법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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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밤샘·강압 수사에 대한 지적도 잇따랐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려 “한 법원 사무관이 검찰에 오후2시에 소환돼 오후10시까지 동일한 내용의 질문만 계속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검찰 수사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조서를 좀 더 꼼꼼히 따져봐야겠다고 얘기하는 판사들도 적지 않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나온 이 같은 문제 제기를 수세에 처한 법원의 반발이나 역공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 관행에 제동을 걸고 신체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과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것은 법원의 당연한 책무다. 비록 늦었지만 판사들이 이번에 검찰에 불려다니고 압수수색을 받으면서 몸소 느낀 문제점들을 앞으로 재판 과정에 잘 반영한다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사태로 무너진 법원에 대한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길도 여기에 있다. /jylee@sedaily.com

이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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