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1964년 김일성 vs 2019년 김정은

70년대 北 무상원조받던 베트남

실용주의로 도이머이 성공 일궈

'상전벽해' 허언그친 아버지 딛고

'개혁이냐 죽음이냐' 각오 다져야




1958년 11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중국 베이징을 거쳐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호찌민 당시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난 김일성은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무료의무교육과 무상치료까지 도입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호찌민은 “인민들이 호찌민이는 뭘 하고 있느냐며 나를 쫓아낼 수도 있다”면서 “다른 데 가서는 제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농담조로 맞받아쳤다고 한다.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베트남에 대한 통 큰 지원에 나설 만큼 월등히 앞선 경제력을 자랑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4,200만루블에 달했을 정도다.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베트남을 찾은 1964년 이후 본격적인 원조가 이뤄진 셈이다.

그로부터 55년 만에 할아버지의 궤적을 따라 하노이를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베트남의 상전벽해를 접하면서 만감이 교차할 듯하다. 과거 원조를 받던 베트남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배 가까이 벌어졌고 경제성장률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호찌민 앞에서 사회주의 강국을 자랑했던 김일성이 살아 있다면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두 나라의 위상이 역전된 계기는 1986년 단행된 도이머이로 불리는 베트남의 독자적 개방정책이었다.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일당 독재를 유지하면서도 단계적인 개방정책으로 해외 자본을 유치함으로써 비약적인 성장을 일궈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정은이 베트남의 경제 발전 모델을 배우고 싶다고 고백한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베트남의 개혁·개방이 호찌민 사망 후에야 이뤄졌지만 그의 실용주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호찌민은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유연함과 융통성을 갖고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강대국의 틈새에서 국익을 지키려면 호불호를 떠나 강대국과의 관계 개선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다.

관련기사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상하이를 둘러보고 ‘상전벽해’라며 “중국 공산당과 인민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북한이 중국 지도부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개방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하지만 말로만 그쳤을 뿐이다. 최근 북한에 다녀온 이들을 만나보면 김정은의 경제개발 의지가 확고하다고 전하는 이들이 많다. 인민의 생활 수준이 획기적으로 개선돼야만 정권도 존립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베트남식 경제개발특구에도 관심이 높다고 한다. 얼마 전 펴낸 북한의 외자 유치 홍보 책자에는 원산과 금강산관광지대 등 모두 27곳을 투자 대상으로 권유하면서 계급 갈등이 존재하지 않아 파업이 전혀 없다는 자본주의식 선전 문구까지 등장했다.

김정은의 딜레마는 핵으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겠다는 모순된 정책을 구사하는 것이다. 북한의 사정에 정통한 팜띠엔반 베트남 종신 대사는 베트남이 도이머이를 도입할 때 ‘개혁이냐 죽음이냐’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처럼 북한도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과 내부 사정이 달라 자기만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마도 북한의 세습 체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겠지만 북한 체제의 안정을 해치는 어떤 정책도 허용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통제된 개혁이야말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김정은은 북미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도 며칠간 베트남에 머물며 선대의 발자취를 좇아 산업단지 등을 둘러볼 모양이다. 실용주의와 국민을 앞세운 개방정책으로 상전벽해한 하노이가 김정은에게 과연 어떤 숙제를 안길 것인지 궁금하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정상범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