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없다.”
이 한마디만으로 한때 대한민국 전역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개그맨 심형래(61·사진). 한쪽 바지를 걷어 올려 입은 한복, 쥐가 파먹은 듯한 머리, 얼굴의 큰 점 등 바보 분장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한국 코미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의 부침도 겪었다.
개그맨 출신의 첫 영화감독, 김대중 정부 시절 ‘신지식인 1호’, 공상과학영화(SF)의 컴퓨터그래픽(CG) 개척자, 연예인 소득 1위, 연예인 모범 납세 1위 등은 영광의 타이틀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 제작사 영구아트의 파산에 이은 개인파산, 도박과 이혼, 고액 세금체납 등 칠흑처럼 어두운 그늘이 공존한다.
누구도 올라가기 어려운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영화 사업의 실패로 인해 철저하게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심씨.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의 인생은 우리나라 초기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영원한 영구’ 심씨를 최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개그맨으로서의 재기, 영화 제작, 테마파크 조성 등에 대한 꿈을 여전히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던 과거보다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그는 인터뷰 첫머리에 불쑥 이 말부터 꺼냈다. 심씨는 배삼룡·서영춘·구봉서·이주일 등의 슬랩스틱코미디언의 계보를 이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계의 레전드’이자 주목받던 SF 영화감독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며 지금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예전에는 스케줄이 6개월이나 밀려 있을 정도로 바빴어요. 제가 나이트클럽 오픈 행사에 가면 그 지역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죠. 지금의 방탄소년단이나 엑소, 이런 아이돌과 같았다고 할까요. 하루에 저녁 행사를 10개씩이나 뛰었고 ‘쇼 비디오 자키’ ‘유머 1번지’ ‘스타쇼’ 등의 TV 프로그램에 나갔어요. 지방에 사인행사 다니랴, CF 찍으랴 정말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어요. 세금을 제일 많이 낸 연예인 1위도 네 번이나 했습니다. 조용필 형, 이주일 선배님보다 많이 냈어요. 당시 안성기 형님이 영화 출연료를 편당 1,500만원 받았는데 저는 러닝개런티까지 해서 2억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한 채가 7,800만원이었던 시절이었죠. 광고도 많이 찍어서 돈이 얼마나 통장에 들어오고 쌓이는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의 그는 어떨까. 이제 최고의 자리는 말 그대로 과거의 일이 됐다. 영구아트센터에서 일했던 직원들에게 체불한 퇴직금 등 책임져야 할 일들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SF영화 제작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지금이 더욱 행복하다고 했다.
“지금은 내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상상력을 펼쳐낼 수 있어요. 요새 오후10시에 집에 가면 오전7~8시까지 컴퓨터 앞에 있습니다. 책도 보도 시나리오도 쓰고 다른 영화도 보고 있습니다. 새벽은 조용하고 전화도 안 오니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죠. 그러다 잠들어서 오후2시쯤 깨는데 ‘아점’으로 핫도그 먹으면서 커피를 마십니다.”
그렇다면 심씨는 왜 개그맨에서 영화감독으로의 변신이라는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는 지난 1980년대 영구라는 전무후무한 ‘인생 캐릭터’로 절정기를 구가했다. 특히 지금의 ‘뽀로로’처럼 당시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초통령’ 같은 존재였다. 그가 출연한 ‘우뢰매’ 시리즈,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 ‘스파크맨’ 등 어린이 영화들이 잇달아 대박이 났다. 영화에서 영구가 문을 열고 나와서 “영구 없다”고 외치는 장면이 나올 때면 어린이 관객들이 모두 “영구 없다”를 ‘떼창’ 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영화계에 내려오는 ‘진짜 전설’이다.
개그맨에서 영화배우로 전향하는 데 성공했지만 위기도 있었다. 당시 군사정권의 ‘건전한 사회 만들기’라는 사회 정책에 따라 몸으로 웃기는 개그를 이른바 ‘저질 개그’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의 주특기인 슬랩스틱코미디의 입지도 줄었다. 그 자리는 말로 웃기는 버라이어티쇼 코미디가 차지했다.
하지만 위기 끝에 전기가 찾아왔다. 김대중 정부가 소프트웨어 강국을 만들겠다는 정책을 펴면서 그는 1999년 ‘1호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심씨는 당시 분위기를 타고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겁니다”라는 명언을 내걸고 웃기기만 하는 ‘바보 영구’가 아니라 영화배우로, 감독이자 제작자로 변신했다. 결국 그는 1999년 12월 영화제작사 ‘영구아트센터’를 설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그를 위한 시대였을 수도 있고 그가 시류를 영리하게 잘 이용하는 타고난 전략가였는지도 모른다.
“개그맨 출신이 영화를 만든다 하니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영화는 대부분 잘 돼서 투자를 많이 받았어요. 누가 뭐래도 제가 CG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생각해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알리타 : 배틀엔젤’에서 CG를 맡은 김기범 총감독이 제가 만든 ‘디워’의 CG를 담당했습니다. 우리나라 SF 영화도 인형 탈이나 쓰는 수준에서 벗어나 미국 영화랑 붙고 싶다는 욕심에서 시작했죠.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저처럼 과거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개봉한 ‘디워’는 785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3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품성이 조악한 가운데 애국심에 의존한 마케팅이라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에는 제가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영화 제작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대기업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토로했다.
2013년 1월에는 거듭되는 사업 실패를 못 이겨 개인파산 신청을 했고 빚 170억원을 탕감받았다. 파산 과정에서 영구아트센터 직원에게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한데다 직원들에게 총을 쐈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중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 기획하고 있는 ‘디워2’가 잘 되면 반드시 체불 임금과 퇴직금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총을 쐈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모략”이라며 “총은 영화를 제작하는 데 쓰는 소품이고 회사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총을 서로 쏘고 그런 것 이상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는 현재 재기를 위해 영화 ‘디워2’ 제작을 모색 중이다. 용이 하늘로 승천한 뒤 우주전쟁이 벌어진다는 스토리인데 미국에서 소니 관계자도 만났다고 심씨는 설명했다. 또 ‘디워’ 등에서 사용했던 크리처를 토대로 국내에 테마파크를 조성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를 둘러싼 숱한 논란에도 ‘개그맨 심형래’만 놓고 보면 그가 ‘레전드’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같은 평가에 힘입어 tvN의 ‘SNL 코리아’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고 ‘심형래쇼’ 공연도 하면서 재기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읽지 못한 탓인지 심형래쇼에서 ‘미투’ 비하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며 “스물다섯 살 딸이 있는 사람”이라고 적극 항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개그맨으로서 재기에 대한 절절한 소망을 피력했다.
“요즘은 슬랩스틱코미디를 하는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요즘도 행사 가서 ‘칙칙이(과거 심형래 캐릭터 가운데 하나)’만 해도 난리가 납니다. 젊은 친구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과거 프로그램을 보고 나를 알더라고요. 요즘은 부모님들이 볼 개그가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공연 등을 통해서 꼭 웃음을 선사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가족끼리 싸우다가도 ‘유머 1번지’를 같이 보면서 그냥 웃고 화해하고 그랬어요. 또 ‘변방의 북소리’를 일주일에 한 번 보려고 학교 끝나고 나면 집에 바로 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다시 한 번 웃기고 싶어요.”
사진=권욱기자
He is △1958년 서울 △1977년 여의도고 졸업 △1982년 KBS 제1회 개그콘테스트 △1988년 KBS 코미디 대상 △1990년 KBS 코미디 연기상 △1991년 한국방송대상 남자코미디언상 △1998년 제5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희극연기상 △1999년 제1호 신지식인 선정 △1999년 12월~2005년 11월 영구아트 대표이사 사장 △2007년 대한민국 국회대상 특별상, 28회 청룡영화제 최다 관객상(디워), 대한민국영화대상 시각효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