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문 사립대 건축학과를 나와 건축설계사로 일했던 김지영(36·가명)씨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이름이 낯설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 민수 엄마, 민재 엄마로 불리는 게 당연했고 건축설계사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꿈은 24시간 육아와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내 아이만큼은 남들 못지않게 키우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안고 보육시설에서 6시간 파트타임을 뛰지만 가끔 잃어버린 ‘김지영’이라는 이름에 가슴 깊은 곳이 먹먹해진다.
아기가 옹알이를 벗어나며 처음 입에 담는 단어 ‘엄마’. 아이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 특별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큰 세상이 바로 엄마다. 각자의 가정환경이나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게 뿌리 박고 있다. 저 멀리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유화부인부터 가까이는 인기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예서엄마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엄마는 곧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희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고정관념이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는 “종(種)의 존재를 포기한 수준”이라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급격하게 떨어지는 출산율에서 드러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이른바 ‘결혼 적령기’로 불리는 세대에서 단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거나 결혼 후 자녀가 없이 살아가는 부부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지난해 실시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미혼여성(20~44세)의 절반(48.0%)은 “굳이 자녀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할 정도로 ‘엄마’라는 전통적인 역할론을 거부하고 있다. “자녀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다(32.0%)”거나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 힘든 사회여서(28.6%)”라며 ‘엄마로 살아가기’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365일 고달픈 엄마살이=미혼 여성들이 한목소리로 호소하는 ‘자녀로 인해 구속되는 자유로운 삶’은 우리네 엄마들의 일상을 살피면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몸이 약한 아이 때문에 기관 돌봄조차 이용할 수 없어 육아를 전담하니 공들여 딴 학위는 장식품이고 결국 나라는 사람이 아닌 누구 엄마로 살게 됐다”는 전업맘 김윤미(서울 거주·34)씨. “육아휴직을 반년만 쓸 수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 돌이 안 된 아이를 집에 두고 회사에 나가야 했던 나에게 ‘애를 내버려 두고 사회 생활하니 좋으냐’는 주변의 비아냥이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워킹맘 최진아(경기도 거주·37)씨. “약사 면허가 있어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지만 아이가 고열에 시달려도 일을 나가야 하는 상황부터 아이 돌봄과 가사, 직장 업무 모두가 내 어깨에 놓인 삶이 힘겹다”는 싱글맘 박진영(경기도 거주·45)씨가 들려준 엄마들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아이를 낳고 난 후 내 삶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과거의 유산, 현재를 옥죄다=출산·양육에 대한 세대별 인식이 급변하는 시기인 만큼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엄마들이 마주한 고충은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그들이 물리적으로 해낼 수 있는 엄마의 역할과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엄마의 간극이 좁혀지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국가가 정규 교과과정을 통해 여학생들에게 ‘현모양처로 자랄 것’을 주문했던 전후 세대의 가치관은 제법 희석됐지만 가족의 행복뿐만 아니라 엄마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인프라는 열악한 게 현실이다. 최근 발표된 글로벌 회계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2019년 직장여성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시장 내 남녀평등 수준은 조사대상 33개국 가운데 33위를 기록하고 있다. 남녀의 임금격차는 34.6%, 한국 생산가능 인구 가운데 남성의 정규직 고용률은 71%에 달했지만 여성은 48%에 그쳤으며 여성 실업률은 42%로 남성 실업률(21%)의 두 배에 달했다. 여성이 전통적으로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엄마라면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해진다. 취업 여성이 자녀 임신 후 다음 자녀 임신 전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거나 일을 하지 않은 비율은 첫째 자녀의 경우 65.8%, 둘째 자녀는 46.1%에 달한다는 조사결과(한국보건사회연구원)가 말하듯 많은 엄마들의 활동 반경이 집으로 제한된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낳고 기르는 ‘전통적인 육아’를 포기하게 만드는 환경으로 작용하는데 기혼여성이 꼽은 이상적인 자녀 수(2.16명)와 실제 출산한 자녀 수(1.75명·2018년 실태조사)의 차이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홍승아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사회와 직장·학교 모두가 양육이나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자로 엄마를 꼽고 있다”며 “이렇듯 왜곡된 사회적 모성 인식은 각각의 여성들에게도 선명하게 각인되며 워킹맘은 죄책감을 갖게 하고 전업맘은 자녀의 성적에 필요 이상 집착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짚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행복한 엄마부터=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떨어지는 출산율에 위기감을 느끼는 정부는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일·가정 양립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지만 ‘이 땅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행복하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개개인의 인식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반의 혁신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이에 서울경제신문은 다양한 삶의 현장 속에서 만나는 엄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외침이 세상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엄마를 응원해’ 연중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모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엄마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게 아닌 아이에게는 세상의 전부이자 각 가정의 중심인 엄마의 삶을 응원하며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제도적 개선과 사회 인식의 변화를 촉구할 계획이다. 차별적 단어인 ‘미혼모’로 불리는 엄마들로부터 경쟁 사회에서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워킹맘’, 이혼이나 사별 후 홀로서기 해야 하는 ‘싱글맘’,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엄마’로 불리는 ‘전업맘’까지 엄마들의 목소리를 기록함으로써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일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