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오후 이희호 여사 별세와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온갖 고난과 풍파를 겪으며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울인 헌신과 노력은 자주통일과 평화 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현 북남관계의 흐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며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뜻을 표했다. 또 김 위원장은 “온 겨레는 그에 대하여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함께 전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판문점으로 보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등에게 조화와 함께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조의문을 전달했다.
이 여사가 생전에 배우자인 고(故)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각별하게 노력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북측 인사의 직접 조문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일각에서 기대했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김 위원장의 친서나 남북관계 관련 메시지도 없었다.
최측근인 혈육을 앞세워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으면서도 현재 북한의 1순위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임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정 실장은 이날 김 부부장을 만난 직후 기자들에게 “김 부부장이 ‘고(故) 이희호 여사님의 그간 민족 화합과 협력을 위해 애쓰신 뜻을 받들어서 남북 간의 협력을 계속해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 실장은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전하는 메시지나 친서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없었다”며 “오늘은 고인에 대한 남북의 추모와 애도의 말씀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측이 전달한 친서도 없었느냐는 질문에도 “없었다”고 답했다.
정 실장과 동행했던 박 의원은 “김 부부장에게 ‘조문사절단이 오기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아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며 “그러나 조의문과 조화를 보내준 김 위원장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려달라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김 위원장은 정치적 의미를 떠나 인간 도의적으로 반드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박 의원은 이 여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직접 찾아가 조문하고 상주인 김 위원장도 만났다는 점에서 “한국은 관혼상제에서 가면 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측은 이날 오후 통지문을 통해 “김 위원장 명의의 조의문과 조화를 전달하겠다”고 알려왔다. 대신 “책임 일꾼인 김여정 동지가 나갈 것”이라며 “귀측의 책임 있는 인사와 만날 것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전일 이 여사 장례위원회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전달한 부음에 대해 이같이 답변한 것이다. 이에 우리 측에서는 정 실장과 서호 통일부 차관, 장례위원회를 대표해 박 의원이 판문점 통일각을 찾아 김 부부장을 만났다.
조문단 파견을 계기로 남북 교착 해소와 대화 재개를 기대했던 여당과 유족 측은 아쉬워하면서도 북측이 조문단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북측 조문단이 내려온 후 청와대를 예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문 대통령이 순방 중인데다 카운터파트인 서훈 국가정보원장마저 아랍에미리트(UAE)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이 현재 시점에서 남측에 조문단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실리가 없다. 지금은 한국보다는 미국과의 대화 재개에 집중하고 있다”며 “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최대한 예우는 갖추는 묘한 전략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통일부공동취재단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