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공상과학(SF) 영화, 특히 우주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용이 어려웠던 ‘인터스텔라’는 몇 번씩 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난주 미 우주탐사선 ‘보이저 2호’의 낭보에 살짝 설렜다. 40년 넘게 우주를 떠돌던 보이저 2호가 목성·천왕성 등 태양계 행성을 지나 태양계 너머 인터스텔라에 진입해 태양계 끝이 뭉툭한 탄환 모양 같다는 진실을 알려온 것이다. 오랜 시간 수수께끼였던 우주의 신비가 풀리고, 더 많은 미지의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문득 20년 넘게 진행되며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켰던 은행권 구조조정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1997년 외환위기 파고에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이 퇴출됐고, 보람·평화·장기신용·강원·충북은행이 합병으로 공중분해되는 등 상당수 은행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소멸했다. 2000년 전후로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로 불리던 5개 대표 시중은행마저 해체됐다. 누가 105년 역사를 자랑했던 조흥은행이 역사 속으로 스러질 줄 생각이나 했을까.
신한·국민·하나·우리·농협. 일명 ‘신국하우농’은 수십년간 무지막지한 전쟁터에서 사선을 뚫고 꿋꿋이 버틴 대한민국 은행의 보루다. 하지만 이들이 십수년 뒤에도, 아니 몇 년 뒤에도 지금의 명성 그대로 존속 가능한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4차 산업 물결에 세상이 급변하고, 금융권이 혁신하고, 은행업 자체의 개념이 허물어지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어느 금융지주 회장이, 어느 은행장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온전히 지금의 은행을 영속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은행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만약 첨단 정보기술(IT)을 탑재한 테크 기업들이 금융 소비자의 마음을 단박에 훔친다면 주객전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대기업 하청업체처럼 은행들이 금융상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빅테크의 벤더사로 전락하거나, 아예 빅테크에 합병당하는 것도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심지어 블록체인 기술이 발달해 새로운 화폐 혁명이 일어난다면 지금과 같은 은행 업무는 불필요해지지 않을까. 초고도화·초스피드의 기술 앞에 은행의 미래는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절박감에서일까. 요즘 은행들은 ‘1급 비상경계 태세’에서 생사를 건 디지털 전쟁을 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비대면 중심으로 영업 방식을 바꾸고, 무인점포를 만들고, 디지털인프라 및 인재 육성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빅테크 대표 주자인 카카오뱅크의 경우 고객 1,000만명을 돌파하고, 예적금·대출은 지방은행 수준으로 커지는 등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불과 출범 2년 만의 성과다. 네이버는 최근 주식·보험, 신용카드, 예·적금 등을 다 아우른 네이버파이낸셜을 종합금융 플랫폼으로 육성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작한 디지털 은행을 앞세워 국내에 우회 상륙하는 일도 시간문제라고 김윤주 보스턴컨설팅그룹 MD파트너는 말한다. 이뿐만 아니다. 1,0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한 토스가 3인터넷은행을 거머쥐기 직전이고, 뱅크샐러드를 비롯한 다양한 핀테크 업체들은 도처에서 금융의 판을 뚫고 나올 기세다. 과연 미래 금융을 향한 은행의 험난한 항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쿠퍼)의 딸(머피)은 미래에서 전해준 아버지의 메시지를 깨닫고, 답을 찾아 새로운 행성에서 인류를 구한다. 그리고 늙지 않고 과거 그대로였던 아버지는 잃어버린 파트너를 찾아 다시 머나먼 희망의 별로 떠난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고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류가 멸종할 위험성이 계속 커지고 있다. 생존을 원한다면 인류의 미래 세대는 우주 공간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머피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생존의 행성을 찾은 것처럼 은행들도 결국 새로운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jsh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