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묻는다. “뭐하고 있어요?”
여자가 답한다.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세상을 보면서, 그리고 새로운 곡을 만들고 있죠.”
남자가 말한다. “내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무엇에 관한 곡이죠?”
여자가 다시 답한다. “물론이죠. 나는 알았어요, 우리의 사진이 없다는 걸. 그리고 이 음악이 우리가 함께한 이 순간을 찍은 사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몇 년 전 봤던 영화 속 한 장면의 대사, 남녀 주인공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남자는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 ‘테오도르’. 여자는 인공지능(AI) 운영체제 ‘사만다’.
2013년 개봉한 영화 ‘Her’는 실연의 깊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던 테오도르가 AI 연애서비스 업체의 ‘제품’인 사만다와 만난 후 느끼는 실제와 같은 사랑을 그린다.
극장에서는 보지 않았던 이 영화를 몇 해나 지나 VOD로 굳이 봤던 건 알파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세돌을 누르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며 ‘느닷없이’ 현실에 등장한 AI의 충격이 그만큼 컸던 탓이었다. 영화 속 AI는 훨씬 더 진화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먼 미래의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기술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체감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지난봄 열린 구글의 개발자 회의에서 선다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구글 듀플렉스를 공개했다. 지난해 AI가 사람을 대신해 전화로 미용실 예약을 했던, 그런데 미용실 직원이 상대가 AI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기술이다. 사만다의 초기 버전인 셈이다.
올해 ‘듀플렉스 온 더 웹’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기술은 전화 대신 e메일로 렌터카 업체에 자동차를 빌리는 시연을 해냈다. 물론 웹사이트의 AI에게는 사람이 말로 명령을 내린다. “헤이 구글! 여행 둘째 날 오전9시부터 3일 동안 렌터카 예약 부탁해. 내 차와 같은 브랜드면 좋겠어.”
AI 기술을 제품화하는 면에서는 구글을 앞서 간다는 아마존 역시 지난 6월 더욱 진화한 딥러닝 기반 솔루션 ‘알렉사 컨버세이션’을 공개했다.
현지에서는 연말이나 내년 초쯤 아마존의 AI 스피커 ‘에코’를 쓰는 소비자들이 더욱 간편하게 저녁 식사나 영화 예약을 알렉사에게 맡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어쩌면 이렇게 “알렉사!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근처에 가성비 좋은 이탈리아 식당 예약해줘. 12월24일 밤6시.”
공상과학(SF) 영화의 명작으로 남은 ‘매트릭스’의 모티브가 된 사이버스페이스는 미국 작가 윌리엄 깁슨의 1982년 소설 ‘뉴로맨서’에 등장한 상상의 산물이다. 이 작품으로 과학소설의 한 장르인 사이버펑크의 거장이 된 그는 2003년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
이 말은 10년쯤 뒤 한국에서 잠시 유명해졌는데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2012년 가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한 연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지금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이미 미래가 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 AI 시대를 열 기반이 되는 것이 빅데이터고 이를 위해 데이터3법의 국회 통과가 절박한데 그들은 합의한 19일 본회의 통과 약속도 어겼다.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래는 내년 총선뿐일지 모르겠다. 혁신에 관심 없는 정치인들에게 이미 와 있는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은 나만 드는 걸까.
답답한 현실 탓인가, 생각은 다시 영화 속 미래로 이어진다. AI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는 어떻게 됐을까. 그 결말을 이야기하면 오래전 영화이기는 하나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되니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다만 아무리 AI가 진화하더라도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안 보신 분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jun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