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공정위 조사 끝났는데 중기부서 또 조사·제재"…공정위 OB들도 쓴소리

"규제만능주의 빠진 부처들

같은 기업활동도 중복 대못

규제를 규제할 법 만들어야"

A기업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가 얼마 후 따로 연락해 ‘공정위 조사 때 제출한 자료를 우리에게도 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공정위 조치가 미흡할 경우 중기부 차원에서도 제재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불공정 하도급 혐의 하나를 두고 공정위는 하도급법을 들이댔고 중기부는 중소기업기술보호법을 내세웠다. 지난해 중기기술보호법 개정으로 하도급법이 우선하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된 듯하지만 하도급법상의 거래라고 판단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두 부처의 중복조사가 가능하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실천모임(대표 김병배 전 공정위 부위원장)이 지난 10일 서울 역삼동 한독빌딩에서 ‘기업활동 중복규제 현황과 정책 이슈’를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A기업의 사례같이 중복규제가 기업활동을 과도하게 옥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복규제의 심각성을 주장한 당사자들은 공정위 고위간부 출신들이었다. 중복규제 이슈가 불거진 것은 최근 상생법(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면서다. 개정안은 공정위가 아닌 중기부도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에 대한 처벌권을 갖도록 했다. 같은 행위를 놓고 공정위와 중기부 두 부처에서 제각각 조사·제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후보자 시절 “(상생법 개정안에) 중복규제 우려가 있다”며 “중기부와 잘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약속대로 두 부처 간 조율은 매끄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불공정 하도급 놓고 여러개 법안 들이대”

국회 상임위 통과한 상생법 대표적

표 의식한 입법, 중복규제 산실 돼


입찰 담합의 경우도 공정거래법과 건설산업기본법·형법이 각기 금전적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4년 호남고속철도 전력선 입찰 담합 사건과 관련해 경찰과 공정위 모두 조사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검찰이 이미 조치한 사건을 두고 공정위가 뒤늦게 과징금을 부과한 사례도 있다. 최근 정보기술(IT) 산업이 발전하면서 방송통신위원회 소관 법률인 전기통신사업법과 공정위 법률인 전자상거래법의 중복규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이동규 전 공정위 사무처장(현 김앤장 상임고문)은 “심지어 공정위 소관 법률 사이에서도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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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공정위 고위관료들은 이 같은 중복규제의 핵심 배경으로 국회를 지목했다. 주순식 전 공정위 상임위원(1급)은 “입법부가 표를 의식해 법률에 규제를 들여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주 전 위원은 최근 ‘타다금지법(여객운수사업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데 대해서도 “일부 목소리가 강한 택시 업계의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목소리가 크지 않지만 다수인 소비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김병배 전 공정위 부위원장은 “의원입법이 중복규제의 산실이 됐다”고 진단했다.

규제개혁위원장을 지낸 서동원 전 부위원장도 “A부처가 하는 것을 B부처는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중복규제를 막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공정거래법이 일종의 ‘경제질서 헌법’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포괄적이기 때문에 다른 법률과 중복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회뿐 아니라 산업정책 부처가 규제 권한을 틀어쥐고 행사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공정위 출신인 배진철 전 공정거래조정원장은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부서는 기본적으로 해당 산업을 육성·조성·지원하는 것이 역할인데 기존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장을 규제하려 든다”면서 “조사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에서의 부당행위에 대해서는 규제당국이 하도급법과 같은 규제법으로 규율하고, 산업정책 부처는 육성정책을 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최영홍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부처마다 저마다의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한다”면서 “규제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규제 일변도가 심각하다”고 한탄했다.

이 전 사무처장은 “중복규제가 없도록 사전 조율하는 게 우선이지만 불가피한 경우에는 부처 간 적극적인 협업체계를 통해서라도 가급적 중복조사를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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