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인텔·마이크론 등 미국 업체의 시장 잠식,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 등 다양한 외부 위협요인에 노출돼 있습니다. 초격차를 유지하기는커녕 지금의 격차가 없어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국내 대표적 반도체 학자인 황철성(사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현재를 이같이 진단했다. 그는 삼성전자 연구개발(R&D)센터를 거쳐 지난 1998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을 지내는 등 반도체 이론과 산업 현장에 두루 정통한 전문가로 꼽힌다.
지난해 12월20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황 교수는 우리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심상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가 특히 심각하게 바라보는 위협요인은 인텔과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맹추격이다. 이들 미국 업체가 기술 격차를 빠르게 줄이며 한국 업체들이 장악한 D램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3·4분기 매출 기준 D램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46.1%로 1위, SK하이닉스가 28.6%로 2위에 올라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4분의3을 차지하고 있다.
황 교수는 특히 “시스템 반도체인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장악한 상태에서 메모리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인텔이 한국 반도체 업계에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텔은 최근 데이터센터용 메모리인 ‘옵테인’을 내놨다. D램의 데이터 처리 기능을 대체하면서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날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게 특징이다. 황 교수는 “메모리인 D램은 CPU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데 CPU 설계에 독보적 경쟁력을 보유한 인텔이 D램을 기존보다 절반만 써도 되는 옵테인을 선보인 것”이라며 “현재 옵테인은 D램만 사용하는 시스템보다 성능이 5% 정도 뒤지지만 인텔의 최근 움직임을 감안하면 안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만약 인텔의 옵테인이 성능 면에서 D램과 격차를 없앨 경우 우리 반도체 기업의 캐시카우인 서버용 D램 시장이 순식간에 쪼그라들 수 있는 셈이다.
D램 시장 3위인 마이크론의 추격도 거세다. 황 교수는 “D램 미세화 공정 수준으로 봤을 때 과거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기술 격차는 2~3년 정도로 여유가 있었지만 최근 격차가 6개월가량으로 크게 줄었다”며 “마이크론이 일본 업체인 엘피다 인수를 통해 삼성전자보다 2배 많은 연구개발(R&D) 인력을 확보한 게 기술 격차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들 업체의 추격을 뿌리치고 한국 반도체 산업이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우수 인력을 현재보다 더 많이 확충하는 수밖에 없다고 황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우수 인재 확충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미국 과학기술대통령자문위원회가 지난 2017년 내놓은 ‘미국의 장기적 반도체 리더십 유지를 위한 대통령 보고서’를 사례로 들었다.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부상을 확실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보고서는 절반을 할애해 미국의 반도체 리더십 유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핵심은 정부가 대학에 반도체 분야 연구 지원을 강화하고 대학이 기초연구를 통해 확보한 기술을 산업화하는 성공 모델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그간 반도체 신기술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현 수준에서 반걸음 앞서 나가기도 굉장히 어려워졌다”면서 “결국 국내 산업 중 초격차 유지가 가장 필요한 반도체 분야에 우수 인재를 더 많이 공급해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반도체 산업이 고도화한 만큼 석·박사, 포스트닥터 등 반도체 고급 인력이 지금보다 10배는 나와야 최상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장비·소재 업체들도 충분한 인력을 확보해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