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상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스타트업 플라밍고의 김상완 대표는 최근 서울의 신용보증기금 지점을 찾았다가 빈손으로 되돌아 나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스마트 상점 수요가 급감하면서 매출이 없자 추가 대출이 거절돼서다. 회사를 포기할 수는 없어 몇 달이라도 버텨볼 요량으로 필요한 인건비와 임대료 등을 포함해 3,000만원을 대출하기 위해 보증을 신청한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자격미달”이었다. 기존에 대출 1억원에 대한 보증이 있어 추가 보증을 받으려면 매출 실적이 필요한데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 대표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또 있었다. 발걸음을 돌린 김 대표의 등 뒤에서 들려온 “기존에 나간 대출 1억원은 언제 갚을 거예요”라는 직원의 말이었다.
플라밍고의 스마트 상점은 일반 편의점이나 음식점 등에 시스템을 깔면 고객들의 데이터가 누적돼 나중에 매출 예측이나 고객관리·재고관리 등이 쉬워진다. 플라밍고의 알고리즘은 오차가 적어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플라밍고는 지난 2월 청와대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 형식의 정부 업무보고에 혁신기업 대표로 초대됐고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3개국 순방에도 동행할 정도로 전도유망했다. 하지만 정책자금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는 ‘매출도 없는 그저 그런 영세기업’일 뿐이었다. 김 대표는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두세 달이라도 버텨보자는 절박한 심정에서 신보를 찾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19 여파로 실물경제는 물론 금융시장까지 휘청이자 “미증유의 비상경제시국”으로 진단하고 “전례를 따지지 말고 대책을 강구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부실 책임 등 뒤탈을 염려해 예전 그대로의 심사기준을 적용하면서 정작 급전이 필요한 기업에 자금이 돌지 않고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스타트업에 50조원의 정책자금을 쏟아붓는다고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것이냐’는 불만들만 생겨나는 이유다.
국내에 여행 온 외국인들에게 맛집을 소개하고 예약해주는 ‘레드테이블’과 콘서트·뮤지컬 등 공연 큐레이션 서비스를 하는 ‘아이겟’ 역시 코로나19에 따른 예약 취소 등으로 매출이 급락하는 등 직격탄을 맞고 있지만 매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도해용 레드테이블 대표는 “지금 상태로는 3개월을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대통령은 전례를 따지지 말라고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은 대출 부실에 따른 책임 문제가 커서다. 정부가 드라이브를 건다고 무턱대고 대출을 해줬다가 나중에 덤터기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어서다. 특히 정책자금을 다루는 신보의 경우 매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자금회수율이 높거나 낮아도 단골로 두들겨 맞다 보니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책자금을 취급하는 한 기관의 관계자는 “정부가 당장 욕을 먹지 않기 위해 대출보증을 해주라고 강조하지만 나중에 책임은 실무자나 기관장이 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면책을 해준다고 백날 얘기해도 현장에서는 와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정책자금을 다루는 기관들의 보신주의를 욕할 수만도 없다”며 “나중에 진짜 문제가 됐을 때 정부나 국회가 이를 끝까지 해결해줘야 하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일선 현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바보가 된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달 1일부터는 신청자가 급증해 병목 현상을 보이는 긴급경영안정자금대출을 시중은행에 위탁해 처리하지만 처리 속도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특수한 경우 부실 심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겠다지만 일선 은행에서는 각 창구에서 보수적으로 심사하기 때문에 (은행이 맡는다고) 병목 현상을 일시에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윤혜정(43)씨는 혼자서 자녀 둘을 키우고 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받아가라고 지금까지 어떤 정부보조금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원생들의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학원 문을 닫으면서 당장 한 달 보증비와 생활비 200만~300만원이 절실한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저신용자 소상공인에게 해준다는 긴급경영안정자금 1,000만원을 종일 긴 줄을 서가며 신청했지만 무슨 사유인지 “대출이 어렵다”며 거절됐다고 한다. 윤씨는 서울경제에 “대통령이 비상경제시국이라고 하고 전례를 따지지 말라고까지 했는데도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며 “우리 같은 소상공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