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대 총선 닷새 전인 지난 2008년 4월4일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한나라당이 170~180석을 얻으면 우호적인 정당을 포함해 200석을 만들어 개헌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은 자체 153석을 포함해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 등 201석의 보수성향 의석을 얻었다.
# 2020년 4월13일 4·15총선 이틀 전 박형준 미래통합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이대로 가면 개헌저지선(100석)도 위태롭다”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자체 180석에 정의당·무소속 등을 합쳐 진보진영에 190석을 확보했다.
12년 전 보수진영 압승 때처럼 야당의 우려는 엄살이 아니었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치러진 이번 선거의 진보 압승에는 ‘일하는 국회를 만들라’는 국민의 엄중한 메시지가 담겼다고 봐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 4·15총선에서도 국민의 선택은 절묘했다. 지역구에서 민주당 163석에 통합당 84석으로 79석이나 차이가 났지만 양당 득표율은 49.9%대41.5%였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41.1%, 홍준표·유승민 후보를 합친 30.8%로 나타났던 민심 지형에서 별반 벗어난 것이 없다. 국난 극복이 다급한 만큼 여당에는 양보를, 야당에는 협력을 국민이 요구한 것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그러니 여당은 압승에 취하지 말고 매사 겸손하고 야당은 국민 지지가 여전함을 믿고 주어진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명령이 이러함에도 여도 야도 달라진 것이 없다.
여당은 겸손을 말로만 한다. 이낙연 공동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두 번이나 국민 앞에 밝힌 1세대1주택 종부세 완화 약속인데 사과 한마디 없이 원안 처리방침을 밝혔다. ‘고소득자 자발적 기부’라는 어색한 방식으로 봉합한 긴급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도 그렇다. 국민에게는 부담을, 야당에는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하위소득 70%’ 기존 안을 갑자기 뒤집은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참패한 야당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긴급재난지원금 문제는 갈팡질팡 혼란스럽고, 일부 보수 유튜버들의 부정선거 의혹 제기에 편승하는 당내 기류까지 나타나고 있다. 당의 활로와 직결되는 ‘김종인 비대위’를 두고도 말들이 많다. 이 엄중한 시기에 저마다 정치적 이득에 몰두하는 듯한 모습이 보기에 딱하다.
코로나19 역병에 이어 경제 해일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1·4분기 민간소비는 -6.4%, 경제성장률은 -1.4% 뒷걸음쳤다. 여야 모두 지금은 경제를 정치보다 상위에 둬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을 명심해야 한다. 법인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관련 제도 개편과 주 52시간 근로제, 최저임금제의 완급 조절을 통해 경기 활성화를 촉진하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을 뒷받침하는 등 21대 국회 앞에 놓인 중차대한 숙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거대 여당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 데버라 엘름스 아시아무역센터 이사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정치인들은 비난받을 만한 대상을 찾으려는 유혹에 빠질 것”이라고 했는데 혹여 그런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야당을 품고 산적한 과제를 이겨내기에도 힘이 모자랄 판에 긴급재난지원금에서도, 비례교섭단체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야당을 ‘나쁜 존재’로 내몰기에 더 무게를 두려는 내심이 있다면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가 말해주듯 의석수만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년 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201석의 보수 우호 의석을 얻고도 친박(박근혜) 계열과 친이(이명박) 세력의 내분으로 쇠락을 자초했고 개헌선 안팎을 유지해온 일본의 자민당 집권 연합도 지금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돌아보면 21대 총선은 정책 이슈도 평가도, 대안도 없었던 ‘3무(無)’ 선거였다. 압승했다고 우쭐할 이유가 없다. 미덥지 못한 여당에 많은 의석을 몰아준 국민의 선택에 보답할 길은 오직 협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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