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빌미로 남북관계 단절까지 거론하면서 남북관계가 현 정부 들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등 국제사회가 도와주지 않아도 남북끼리 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라”는 청와대 뜻을 받아 통일부를 중심으로 진행하던 각종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사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 등으로 얽힌 한미 관계, 미중 갈등 속에 애매해진 한중 관계, 반일 여론만 재생산하며 앞길이 보이지 않는 한일 관계 등 주변국의 지지를 얻기도 힘든 상황에서 당분간은 남북 관계 개선의 활로를 찾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관련기사> ▶[단독] 아무도 없는데.. 남북연락사무소 시스템 통째로 '업그레이드'
탈북자 삐라 핑계로 남북 단절 경고한 32살 김여정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4일 노동신문을 통해 담화를 내고 “지난 5월31일 ‘탈북자’라는것들이 전연 일대에 기어나와 수십만 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 측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망나니 짓을 벌려놓은 데 대한 보도를 보았다”며 “문제는 사람 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함부로 우리의 최고 존엄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만약 남조선당국이 이번에 자기 동네에서 동족을 향한 악의에 찬 잡음이 나온 데 대하여 응분의 조처를 따라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금강산관광 폐지에 이어 쓸모 없이 버림받고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공동련락사무소폐쇄가 될지, 있으나마나한 북남군사합의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각오는 해두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여정이 포문을 연 북한의 대남 비난 담화는 북한 매체를 통해 사실상 하루도 거르지 않고 쏟아졌다. 북한 선전매체 ‘통일의 메아리’와 ‘메아리’는 5일 김여정 담화에 대한 각지 주민의 반응을 전하며 남측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다. 매체들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대북전단 살포를) 수수방관하고 묵인 조장하는 남조선 당국의 음흉한 심보”라며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남조선당국이 더러운 짓을 할수록 우리 천만 군민의 보복 의지만 백배해지고 저들의 비참한 종말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며 “상상할 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대북전단 살포가 벌써 10년 가까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북한이 굳이 이를 트집 잡은 배경엔 북미관계 악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외교적 위기의 책임을 남측에 전가시키려는 목적이 있다고 분석했다. 남북 간 긴장 수준을 높여 내부 결속을 다지고 미국에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내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통일부, “삐라 중단시키겠다” 진화 나섰지만 모욕만...
북한의 대남 비난의 화살은 김여정 담화 직후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방안을 준비하겠다”고 진화에 나선 통일부로도 향했다. 한국 국내에서는 통일부가 김여정의 요구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는데 북한은 남측이 진작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적반하장 식으로 모욕을 준 것이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4일 김여정 담화가 발표된 지 고작 4시간 만에 정례브리핑을 갖고 “정부는 전단살포가 접경지역 긴장 조성으로 이어진 사례에 주목해서 여러 차례 전단살포 중단에 대한 조치를 취해 왔다”며 “실제로 살포된 전단의 대부분은 국내 지역에서 발견되며 접경지역의 환경오염, 폐기물 수거부담 등 지역주민들의 생활여건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어 “남북방역협력을 비롯해 접경지역, 접경지역의 국민들의 생명·재산에 위험을 초래하고 하는 행위는 중단돼야 한다”며 “정부는 접경지역에서의 긴장 조성 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 방안을 이미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 통일전선부 대변인은 5일 담화를 통해 여상기 대변인을 겨냥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통일부 대변인이 가을 뻐꾸기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며 “저들이 오래전부터 삐라 살포방지대책을 취해왔고 실효성있는 제도개선방안도 검토하던중이라며 마치 아차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듯이 철면피하게 놀아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여정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부문에서 담화문에 지적한 내용들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문재인 정부를 압박했다.
文정부, 연락사무소 ‘업그레드’ 추진하다가 ‘날벼락’
북한의 이 같은 강경 자세는 문재인 정부가 통일부를 통해 추진하던 각종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사업에 엄청난 찬물을 끼얹을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교류 재개 시 첫 접선지로 관측됐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문재인 정부가 관련 시스템을 통째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가 김 빠지는 상황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서울경제 취재에 따르면 통일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는 오는 9일부터 11일까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신규 그룹웨어 도입 및 자료관리 시스템 구축사업’ 사업자를 찾고 사무 시스템을 사실상 통째로 교체하기로 했다. 2018년 9월 사무소가 문을 연 지 고작 1년9개월 만이다. 그룹웨어란 컴퓨터로 연결된 작업장에서 협업을 지원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을 말한다.
해당 사업에는 그룹웨어 구축에 필요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는 물론 전자결재 시스템, 별도 포털, 게시판, 메일, 업무용 메신저 등이 모두 포함됐다. 사무처는 그러면서 향후 확장성도 보장된 시스템을 구축해달라고 주문했다. 사업기간은 60일이며 총금액은 5,860만원이다.
문제는 해당 소식이 본지 보도를 통해 처음 알려진 지 고작 하루 만에 김여정이 연락사무소 자체를 폐쇄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이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지난 1월30일부터 잠정 폐쇄된 상태다. 사무소에서 철수한 남북 실무자들은 대면으로 접촉하는 대신 현재 전화·팩스선을 사용해 하루 두 차례 연락만 취하고 있다. 김여정이 사실상 ‘영구 폐쇄’ 카드를 꺼내면서 이 사업은 의미는 크게 퇴색된 것으로 평가된다.
눈앞 캄캄해진 ‘나홀로’ 평화사업들
비상이 걸린 문 정부의 ‘나 홀로’ 평화 사업은 이뿐만이 아니다. 통일부 등 관계 부처들은 최근 문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해 남북 교류가 재개될 것을 대비해 현재 각종 사업을 추진 중이다. 문 대통령 임기 내에 남북 관계에 뚜렷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목표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27일 판문점선언 2주년을 맞아 “여건이 좋아지길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며 “우리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통일부와 국토교통부는 우선 지난 4월27일 강원 고성군 제진역에서 동해북부선 사업 추진 기념식을 열었다. 또 이달 중 판문점 견학 재개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비무장지대 내 한국군 감시초소(GP) 총격 사흘 만인 5월6일 판문점 인근을 둘러봤다. 이달 3일에는 경기 파주에 남북산림협력센터를 준공했다. 통일부는 당초 6·15 선언 20주년 남북공동행사도 추진했으나 북한의 무반응으로 결국 무산됐다.
김연철 장관은 지난달 8일 기자간담회에서 국제 제재를 피해 한국 정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업부터 적극 추진하겠다며 코로나19와 관련한 보건협력을 가장 강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