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된 24일 정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인근에서는 여느 수요일처럼 수요집회가 열렸지만 집회 장소가 바뀌었다. 평화의 소녀상 곁이 아니라 그로부터 약 10m 떨어진 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보수단체의 ‘위치 선점’으로 장소를 빼앗긴 수요집회에서 정의기억연대와 참가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위를 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지난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 방한에 앞서 시작된 수요집회가 타 단체의 위치 선점으로 장소를 바꿔 개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수송동 연합뉴스 사옥 앞에서 열린 제1445차 수요시위에서 “빗방울이 눈망울에 맺힌다”며 입을 열었다. 이 이사장은 “수요집회는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피해자 추모를 위해 한 번 거른 것을 제외하고 1400차를 넘겨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며 “평화의 소녀상을 가운데 두고 다가갈 수 없는 ‘슬픔의 협곡’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밀려나고 빼앗기고 탄압받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도 이 자리에 있겠다”고 밝혔다.
이날 수요집회에는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200여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굵은 빗줄기에도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든 채 집회를 이어갔다. 경기 시흥시에서 왔다는 김홍순(63)씨는 “보수단체가 집회 장소를 빼앗은 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나 연차를 내고 왔다”며 “비가 오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수요집회는 일곱 차례의 연대발언이 이어지면서 예정보다 15분 늦게 끝났다.
당초 옛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 주변에서는 자유연대가 집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대학생 20여명이 전날 오후부터 이틀째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보수단체들은 인근에 무대를 설치하고 정의연 해체를 촉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수요집회 참석자와 보수단체 회원 간 물리적 충돌도 우려됐지만 이날 집회는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경찰은 병력 400여명을 투입해 두 집회를 겹겹이 에워싸고 양측을 분리했다. 자유연대가 다음달 중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옛 일본대사관 앞을 대상으로 집회신고를 한 상태여서 매주 수요일에는 양측 간 긴장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