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보훈처, ‘8월의 독립운동가’에 이석영 선정

전재산 독립운동에 바치며 항일투쟁

노후에 극심한 생활고···빈민가서 생 마감

이석영 선생 영정.   /사진제공=보훈처이석영 선생 영정. /사진제공=보훈처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독립기념관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55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석영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다가 1910년 동생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로 건너갔다.

이석영 일가의 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설립됐다. 이곳에서는 농업개발과 민족교육·군사교육 등을 통해 구국인재를 양성하고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석영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돼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에서 개교식를 가졌다. 이곳에서 1920년까지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독립전쟁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석영은 1912년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그가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는 이석영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석영은 노후에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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