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30대에 디지털 마케팅 회사인 ‘제일 펑타이’의 광저우 법인장을 지낸 정병우 대표. 외국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리더로 지내는 동안, 그는 문화의 다름을 깨닫고 진정한 소통의 방식을 배웠다. 동시에 온라인 매체로 글로벌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들과 신사업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반대로 가장 한국적인 장을 담그던 분이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손수 고객들에게 정성스런 편지를 보냈다. 시대가 변하고 소비자 층이 달라져도 그 방식을 지키려고 하셨다. 아들이 생각하는 성장의 방향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전통을 추구하던 가업을 물려받기로 결심한다. 점점 떨어지는 매출을 다잡아야 했고 시대의 흐름도 반영해야 했다. 전통을 지키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만포농산’의 두 번째 CEO, 정병우 대표를 한식 레스토랑 ‘주옥’에서 만나보았다.
-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이 종종 들려주셨던 트로이목마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했고 특히 슐리만이 직접 그걸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고고미술사학과로의 진학을 꿈꿨지만 이 전공을 가진 학교는 몇 개 없었고, 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국 도움이 될 전공을 찾다 서양사학과를 택했다. 사실 한자가 싫어 서양사학과를 선택했는데 나중에 중국에서만 10년 넘게 일을 하고 있더라.”
- 원래는 계속 공부를 하려 했었다고?
“고고학자가 꿈이었으니까. 비슷한 진로를 결심한 선배를 만나보니 비교가 안될 만큼 지식수준이 높았다. 내가 그런 결심을 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근데 재밌는 건 사실 그 선배도 공부 안하고 커피 리브레라는 커피 사업을 한다.) 때마침 집안 사정도 넉넉지 못해 취직을 결심했다. 취직을 결심하고 나서는 무조건 연봉 많이 주는 회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운 좋게 삼성 그룹 공채에 합격했다.”
- 첫 직장에서는 어떤 직무를 맡았는지?
“계열사를 내가 정할 수 있었다. 명확한 인생 목표도 없었고, 연봉 높은 곳이 기준이었기에 선배들에게 물어보고는 삼성화재를 택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정말 힘들었다. 신입사원 연수 후 영업 지점으로 발령 받았는데 설계사 분들께 화내는 게 일이었다. 20대인 내가 나이 많은 설계사 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이상했고. 내가 부재할 때 영업 실적은 오히려 더 좋았다.”
-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겠다.
“그렇다. 회사 선배들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 크더라. 나 역시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 부모님이 귀농 후 시작한 된장 사업이 소위 터졌다. 지인분들께만 선물용으로 소소히 판매 하던 게 어쩌다 대기업 임원에게 들어갔는데 어마어마한 선물용 물량을 주문해줬다.”
- 회사를 그만둔 계기는?
“선물세트 물량 증가로 매출이 억 단위로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힘들면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하시더라. 일단 퇴사 후 경영 대학원에 갔다.”
- ‘제일 펑타이’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경영대학원을 다닐 때 먼저 제일 펑타이(당시 회사명은 삼성 오픈타이드)에 취직한 선배가 인턴 제안을 했다. 방학 때 중국에서 하는 인턴 경험이었는데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당시 한국 기업들이 중국으로 활발하게 진출할 때라 일도 많았고. 덕분에 인턴 직책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제법 큰 역할을 경험 해볼 수 있었다.”
- 이후 바로 취직 제안이 왔다고?
“인턴이 끝난 후 한국으로 온 뒤 취직 제안이 왔다. 그래서 석사 논문도 포기한 채 바로 중국으로 향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 직급에서는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프로젝트와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재원이 아닌 현지 채용으로 입사했는데, 주재원 수당은 없었지만 연봉은 나쁘지 않았다.”
- 중국의 성장을 눈앞에서 본 심정은?
“당시 중국이 초고속 성장하던 시기였기에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들을 매일같이 보냈다. 초기 80명이던 직원도 나올 때 즈음에는 1천300명이 넘었다. 매출도 100억에서 1조를 바라보게 될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2005년부터 불과 15년 만에 이룬 성과다.”
- 30대 때 법인장을 맡게 됐다.
“만으로 14년 중국 생활을 하는 동안 인턴부터 법인장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처음 법인장을 시작한 게 38살 때다. 어느 날 대표님이 부르시더니 광저우 법인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셨다. 너무 큰 자리를 제안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가장 컸다고 들었다.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 장점으로 작용했다. 북경, 상해 등 다양한 지역 및 부서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면에서도 좋게 봐주신 거 같다.”
- 대개 본사 공채가 법인장이 되지 않나?
“보통 법인장은 공채 문화가 작용한다. 그런데 당시 제일기획이 디지털을 막 강화하던 때였고 제일 펑타이는 디지털 중심으로 중국에서 오래 일을 해온 조직이었다. 현지 상황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아는 것도 있었고. 그런 점들이 작용했던 것 같다.”
- 오프라인 사업 영역도 있었는지?
“조사와 컨설팅 사업부도 있었고 오프라인 유통관리, 판촉원 관리도 있었다. 중국은 워낙 땅이 넓다보니 유통 관련 진단과 현장관리에 사업기회가 있었다. 그러다 현재는 다시 디지털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법인장으로 있었던 광저우는 상대적으로 작은 조직이라 다양한 디지털 관련 신사업 개발에도 많이 참여했다.”
- 중국의 디지털 광고 수익 체계는 어떤가?
“회사마다 구조는 다르겠지만 우리 경우 초반에는 광고주 별/프로젝트별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그러다 나중에는 투입된 인력을 기반으로 하는 비용 청구 구조로 정착해 갔다. 피(Fee) 베이스 구조였고, 일부는 커미션 베이스도 있긴 했었다.”
- 아무래도 삼성 중국 법인 물량이 많겠다.
“삼성에 대한 의존도가 입사 초기에는 90프로 이상이었다. 그러다 내부적으로 삼성 의존도를 낮추지 않으면 회사 경쟁력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외팀에 투자를 많이 했고 외부 비딩도 많이 들어갔다. 중국 기업이나 글로벌 기업들을 꽤 개발해 삼성 비율이 50프로 정도까지 줄였는데 사드 영향으로 중국 기업 물량이 일부 줄었다.”
- 중국의 광고 시장은 어떤가?
“한국보다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추세다. 크리에이티브가 다소 떨어져 보이는 면은 있다. 그런데 크리에이티브 하는 친구들 만나보면 실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그래서 이유를 살펴봤더니 15억 인구 중 아직 대다수가 하급도시에 생활하는 사람들인지라 그들을 타깃으로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더라. 가끔 고급 브랜드 크리에이티브를 보면 어지간한 글로벌 업체보다 나은 경우도 많다. 공산주의 국가면서 시장논리가 가장 명확히 작용하는 시장이라 본다.”
- 자본의 크기가 결국 시장 영향력을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 오히려 수요나 구매력이 막강하니 명품 브랜드들이 중국기업과 콜라보를 하고 중국 문화를 대폭 수용한 에디션을 만들어 낸다. 처음엔 어색해 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게 글로벌 트렌드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시장이 크고 자본을 쏟아 부으면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 리더십, 어렵진 않았나?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중국 사람들은 일하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더라. 가장 극단적인 예로 우리는 윗사람 이야기를 알아서 잘 따르는 문화가 있다. 윗사람들이 일을 애매하게 주면 애매한 부분을 고려해 업무 처리하고. 그런데 중국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윗사람이 시킨 일만 하고 간다. 처음엔 게을러서 그렇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나라가 크고 사람이 많다 보니 이해관계 자체가 복잡해 다른 사람 일을 간섭하면 안 되는 구조더라. 우리처럼 남의 일 돕고 봐주기보다 자기 일 정확히 처리하자라는 주의랄까. 좋게 이야기하면 자기 일에 대해 명확히 하고 책임지는 구조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관료주의 성향이 좀 있다할 수 있겠다.”
- 가장 힘들었던 지점은?
“각자의 일만 딱 해서 주니 리더 입장에서 업무 간 빈 부분을 메꾸는 게 힘들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빈 부분을 메꾸다 나중엔 직원들에게 짜증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중국 직원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 흐름에 적응하기까지 7~8년이 걸렸다. 결국 내가 업무를 정확히 지시하지 못했다는 걸 시간이 지난 후 깨달았다. 나도 너무 젊고 치기어린 시절이라 문화와 시장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과 좋은 역량의 친구들을 활용 못한 탓이 컸다.”
- 이후에는 다른 방식의 리더십을 선택했다.
“중국 직원들과 가까워지면서 중국 문화, 특히 중국 사람들 자체를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출장 갈 때도 예전에는 편하니까 한국 직원들 위주로 데려가곤 했는데 나중엔 일부러 중국 직원들과 함께 다녔다. 적극적인 소통 및 음식이나 술도 최대한 중국식으로 했다. 그렇게 친해지며 대화를 하다 보니 중국 직원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친구들도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시너지가 나기 시작했다.”
- 성과에 대한 압박은 없었는지?
“당연히 있었다. 광저우 법인은 이익은 냈지만 목표 달성을 매번 못했다. 그런데 그 목표 달성이라는 것도 위에서 떨어지는 숫자였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와도 어려운건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이었기에 윗분들과 충돌이 좀 있었다. 관리부서나 상사 분들이 나 때문에 마음고생 좀 하셨을 거다. 그래도 제일 펑타이 회사 전체를 봤을 때 목표달성을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장을 만드는 가업, 언제부터 시작했나?
“고등학교 2학년 즈음 서울서 하던 아버지 사업이 잘 안돼서 고향인 영주로 내려갔다. 귀농을 생각하며 내려가셨고 처음에는 사과 농사를 했다. 농사를 짓다 겨울 농번기에 시간이 뜨니 어떻게 활용할까 하다 자연스레 장을 담그게 됐고. 지인 위주로 소소하게 판매했는데 먹어본 지인들이 추천을 하며 주문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몇 년간은 조그마한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 지속적으로 판매를 하다 보니 조금씩 성장하게 됐다.”
- 2020년 올해 아버지가 하던 전통장 가업을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중증천식으로 몸이 많이 안 좋으셨다. 사실 가업을 물려받는 건 대학원 때부터 생각이 있었다. 졸업 후 또 명확한 목표나 비전 없이 취직을 하려니 갑갑한 마음도 있었고. 하지만 아버지는 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고 돌아오길 바라셨던 것 같다. 결국 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퇴사를 했고, 올 초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회사를 이끌게 됐다.”
- 식당을 열려고도 했었다고?
“대학원 시절 삼청동 한옥을 사 카페로 개조한 친구 가게를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나도 삼청동에 한옥 하나 구해 집에서 만든 된장으로 된장찌개 집을 하면 잘 되겠다 싶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음식 장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만류하시더라. 일단 자기가 사업을 좀 더 키워보시겠다며. 때마침 그때 중국에 갈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 아버지와의 다툼도 많았다. 어떤 이유 때문인가?
“아마 가업 이어 받으실 생각이 있거나 받으신 분들은 동의하실텐데 아버지 사업이 커지면서 의견 차이가 점점 심해졌다. 사업 초반에는 내 의견에도 귀 기울여 주셨는데 사업이 커지니까 아이디어를 내면 사업을 잘 모른다며 듣지 않으려 하셨다. 서비스업 하는 사람이 제조업을 어떻게 이해하냐며 반박도 많이 하셨고.”
- 답답한 마음은 없었나?
“아버지 건강이 크게 악화되셨을 때는 나도 정말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를 뵈러 가면 사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며 완강하시더라.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온라인으로 키워보자고 하면 다짜고짜 반대부터 하셨다. 요즘의 흐름을 반대하는 모습이 답답했다. 아버지 눈에는 아들이 여전히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 매출이 떨어지는데도 고집을 피우셨다고?
“아버지도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매출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속상한 건 장 맛이 떨어진 것. 지금에서야 하는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아프시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두 분 다 회사 관리에 집중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 사업을 맡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언젠가 내가 나서서 받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좋은 회사에서 충분한 연봉 받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는데 아버지와 부딪혀가며 이 일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흔들리는 가업을 내가 잘 잡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 가업을 물려받는 걸 어머니는 염려하셨다고?
“어머니도 아들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시다가도 한편으로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오랜 기간 아나운서, 언론사 등에서 근무하신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분이라 당시 나의 커리어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셨다.”
- 회사를 맡은 후 매출은 개선이 되었는지?
“민망한 이야기지만 매출이 오히려 조금 더 줄었다. 코로나19 영향도 있지만 장류라는 산업 자체의 한계가 몇 가지 있다 생각한다. 일단 비싼 돈을 내고 전통장을 사려는 마음이 크지 않다. 그리고 장류는 제품을 한 번 사면 최소 반년 정도는 먹는다. 사실상 제품 가격은 만 원 정도인데 재구매까지 사이클이 엄청 길다보니 사업체 입장에서 매출을 내기 어렵다. 어르신들이 보내주시는 경우도 많다보니 구매를 굳이 하지 않는 것도 있다. 마지막으로 장류 시장의 매출에서 명절 선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선물 문화도 줄어들고 젊은 층이 선호하는 선물의 종류가 달라지기도 했다. 소비의 선순환이 아무래도 어려운 카테고리다.”
- 식문화가 달라진 것도 영향이 있겠다.
“메인 제품이 된장인데, 된장찌개의 경우 부재료가 많이 들어가다 보니 다른 찌개로 대체되곤 한다. 예를 들어 김치찌개는 김치와 참치 캔만 있어도 얼추 만들 수 있지 않나. 된장찌개는 육수내고 온갖 야채가 필요한데. 요즘엔 레토르트나 밀키트가 잘 되어있지만 설비나 마케팅이 중요하면서 변화가 빠르다보니 우리 같은 소형업체가 들어가기 어려운 시장이기도 하다.”
- 경쟁사가 많이 생겼다고?
“귀농 트렌드와 진입 장벽이 낮은 산업 특성상 경쟁사가 많이 생겼다. 장은 오래 묵혀둘 수 있으니 재고 부담이 적은데 그 이점이 우리에게만 있을 리 없었다. 누구에게나 장점인,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부담이 더 커진 것도 있다.”
- 본인만의 솔루션을 찾는 중인가?
“현재 미슐랭 1스타 ‘주옥’의 신창호 쉐프와 뭔가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된장찌개 밀키트를 생각했는데 퀄리티에 맞추다 보니 재료 원가가 너무 높아지더라. 그래서 지금은 한식에서 활용할 수 있는 소스를 개발 중이다. ‘주옥’과의 콜라보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실제 사용하고 있는 소스를 일반 가정에서도 편하게 수 있도록 개발하고 있다.”
- 전통장만 고집하던 회사에겐 새로운 시도다.
“이제는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만드는 절차나 과정에서는 전통을 지키되 소비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줘야 한다. 아까 이야기한 소스 개발과 이 소스를 활용해 간단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레시피와 사용편의성을 높인 포장 디자인을 동시에 고민하고 있다. 현재 판매의 70프로를 차지하는 된장, 볶음 고추장, 참기름, 들기름을 콜라보 등으로 활용해보고자 한다.”
- 그간 레시피는 어떻게 만들어 관리해왔나?
“회사가 20년 정도 됐는데 부모님이 만들어둔 레시피로 활용한다. 그 레시피란 부모님이 발품 팔아 다니며 직접 배우고 만들며 정리한 레시피다. 특별하게 R&D팀이 있다거나 담당자가 있는 건 아니다. 이제는 그 레시피를 젊은 감각으로 확장하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신창호 쉐프 같은 든든한 파트너도 있고.”
- 브랜드 이름이 ‘무량수’다. 어떤 뜻인가?
“무량수는 말 그대로 다함이 없는 양의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이란 의미이다. 드시는 분들께서 건강하셨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라는 영주의 핵심 브랜드 때문에 지은 영향도 크고. 아버지가 생각하신 게 지역 농산물을 활용하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지역 색과 인지도 높은 무량수를 선택했다. 가끔 절에서 만드는 제품이냐고 문의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종교적 의미는 전혀 없다.”
- 현재 매출과 직원 현황은?
“매출은 20억 정도지만 잘 될 때는 40억 까지도 갔었다. 직원은 정직원 기준 10분이다. 장이라는 제품이 4계절 내내 생산하는 게 아니다보니 바쁜 시즌에 추가로 일을 요청해 움직인다.”
- 폐교를 구입해 장을 담그고 있다.
“그렇다. 폐교를 개조해 운동장에서 장을 숙성하고 교실은 사무실로 쓰고 있다. 메주를 만들고 발효하거나 포장하는 시설은 별도 공장을 건설해 사용하고 있다. 공간이 제법 넓고 잘 꾸며져 있어 할 수 있는 이벤트도 많을 것 같은데 아직은 퀄리티를 올리고 제품 디자인 등 완성도를 높이는 게 먼저다. 나중엔 폐교 2층을 오픈 키친이나 숙박시설로 활용해볼까 고려 중이다.”
- 사업을 하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어떤 식으로든 성장해야 하는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력수급의 문제다. 회사가 지방에서도 워낙 시골에 위치하다 보니 직원을 뽑는 게 너무 어렵다. 생산 직원 분들의 고령화도 걱정되는 부분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하나 고민이 많다. 정부 지원사업이 수도권에만 몰려있는 것도 아쉬운 지점이다.
- 장이라는 제품 속성에 대한 고정관념도 있는지?
“장이라는 아이템은 젊은 친구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내가 봐도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장 담급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하다는 느낌이 있으니까. 삼청동에서 한옥을 구입해 카페 하는 친구가 안동에서 맥주 브루어리를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는 맥주의 장인이 되고 싶어 하는 젊고 의욕 넘치는 친구들이 있다. 가장 부러운 부분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장을 만드는 것도 멋지다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 앞으로 가장 큰 목표가 있다면?
“누가 먹어도 맛있는 한국식 장을 만들어보고 싶다. 아무 설명 없이 이게 뭔지 잘 몰라도 먹으면 ‘아 맛있네!’ 하는 것. 내수 시장은 줄고 글로벌 한식에 대한 관심은 늘고 있는 게 트렌드다. 그 흐름에 맞춰 이탈리아의 올리브 오일과 토마토소스, 중국의 굴소스, 베트남의 스리라차처럼 누구나 맛있다 느끼면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한식장을 만들고 싶다.”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