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외곽 알칸타라. 개울 하나를 두고 포르투갈과 침략자 스페인이 맞섰다. 싸운 이유는 왕위 경쟁. 포르투갈의 왕 세바스티앙이 무어족과의 전투(1578년)에서 24세에 전사하면서 후계 문제가 떠올랐다. 요절한 국왕의 작은아버지이자 추기경인 엔히크가 급한 대로 보위를 이었으나 고령의 성직자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결국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방계에서 왕위 계승자 3명을 골랐으나 모두 문제가 있었다.
첫째 후보는 수도원장 안토니우(49세). 전전임 국왕 미구엘 1세의 아들이었으나 사생아라는 점이 걸렸다. 다음은 미구엘 1세의 친손녀인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40세). 포르투갈 귀족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여성이라는 이유에서다. 셋째 후보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53세). 외손인데다 외국인이라는 약점에도 유력 계승자로 떠올랐다. 돈의 힘 덕분이다. 세비스티앙 국왕이 전사할 때 포로로 잡힌 장병들의 몸값을 치르는 데 재정이 고갈된 상황. 포르투갈 귀족들은 펠리페 2세가 뿌리는 돈에 녹아났다.
엔히크 국왕 사망 후 안토니우가 선수를 쳤다. 포르투갈 국왕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펠리페 2세는 즉각 2만여 군대를 보냈다. 지휘관은 73세의 알바 공작. 고령이지만 네덜란드 총독 시절 가혹한 세금과 폭정·압제로 악명이 높았다. 절반은 독일과 이탈리아 용병이었다. 안토니우는 흑인 노예병 3,000명을 포함해 8,500명으로 맞섰으나 승패는 시작과 함께 갈렸다. 스페인군은 곧 리스본을 점령하고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왕관까지 머리에 얹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60년 동안 한 나라였던 이베리아 연합 시대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1640년 카타리나의 후손들이 브라간사 왕조를 열고 독립을 찾았지만 합병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때 스페인과 더불어 지도상으로 세계를 양분하고(토르데시야스 조약) 일본에 조총도 전해준(1543년) 포르투갈의 기운은 왜 떨어졌을까. 끝없는 확장은 전시상태의 일상화를 낳고 끊임없는 재정투자로 이어졌다. 3년만 복무하고 교체되는 총독들은 횡령과 거짓 보고를 일삼아 재정악화를 부채질했다.
재정은 나빠져도 무역으로 인한 과잉 유동성에 눈먼 왕실과 귀족들은 향락에 빠져들었다. 자금이 필요하면 외국에 손을 벌렸다. 귀족들이 필리페 2세를 받아들인 것도 명분보다 사익을 먼저 생각한 탓이다. 승리한 필리페 2세도 마찬가지. 위신을 세운 대가가 컸다. 전쟁을 좋아해 채무불이행만 다섯 차례 선언할 만큼 재정이 거덜 나고 스페인도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