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측이 우리 해양수산부 공무원을 사살하고 시신마저 훼손한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청와대가 공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 통지문과 친서가 분위기 반전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사건 이틀 뒤에야 전말을 공개하고 입을 모아 북한을 규탄했던 청와대·정부·여권 인사들이 김정은의 사과문이 도착하자 단 하루 만에 “이례적인 일”이라며 기대감을 높이는 쪽으로 자세를 고쳐 잡은 모양새다. 여기에 여권 핵심 지지층들까지 적극 동조하는 태도로 힘을 보태고 있다. 그 근간에는, 당연하지만,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최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이르기까지 단절돼 왔던 남북 대화가 재개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다만 사망자의 ‘월북’ 여부와 시신훼손,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대응, 북한군의 실제 조치 취지 등 여러 사항이 미스터리로 남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쯤에서 논란을 끝내자’는 김정은의 제안을 우리 정부가 그대로 받을 경우 반대 여론도 만만찮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정은은 북미 관계 회복 전까지는 남북 대화·교류 재개에 별 뜻도 없는데 우리만 김칫국을 마시고 억울한 죽음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번 민간인 피살을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불씨로 활용하려는 현 정권과 이에 반감을 갖는 집단 사이에 또 다시 여론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김정은 “文대통령과 남녘 동포에 미안... 불상사 재발 방지”
지난 25일 청와대에 따르면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는 이날 우리 정부에 통지문을 보내고 “국무위원장 김정은 동지는 가뜩이나 악성 비루스(코로나19) 병마 위협으로 신고하고 있는 남녘 동포들에게 도움은커녕 우리 측 수역에서 뜻밖의 불미스런 일이 발생해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 전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북측 지도부는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상경계감시 근무를 강화하며 큰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일이 없도록 해상에서 단속취급 전 과정을 수록하는 체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며 “북남(남북) 사이 관계에 분명 ‘재미없는’ 작용할 일이 우리 측 수역에서 발생한 데 대해 귀측에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고 덧붙였다.
통지문에는 “최근에 적게나마 쌓아온 북남 사이 신뢰와 존중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게”라는 표현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전부 명의로 온 통지문이라도 사실상 김정은의 직접적인 입장 표현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했다.
다만 북측이 통지문에서 밝힌 사실관계는 우리 군이 전날 발표한 내용과는 차이가 컸다. 북한은 북측 해역에서 희생자 A씨를 발견하고 접근해 신분을 확인한 뒤 도주 움직임을 보이자 10발의 총탄으로 사격했다고 주장했다. 또 A씨의 시체가 아니라 타고 있던 ‘부유물’을 해상에서 소각했다고 전했다. 이는 A씨를 북측에서 발견한 지 6시간 후에야 상부 지시를 거쳐 사살·소각했다는 우리 군 당국의 발표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국무위원장님 생명존중에 경의” 갑자기 文-김정은 친서 꺼낸 靑
김정은의 통지문 발송만큼 갑작스러웠던 것은 그 직후 이어진 청와대의 행동이었다.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한의 통지문 기자회견을 한 뒤 고작 2시간 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주고받은 친서를 돌연 공개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김정은에게 “국무위원장께서 재난의 현장들을 직접 찾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로하고 피해복구를 가장 앞에서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깊은 공감으로 대하고 있다”며 “특히 국무위원장님의 생명존중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이에 김정은은 12일 “오랜만에 나에게 와 닿은 대통령의 친서를 읽으며 글줄마다에 넘치는 진심 어린 위로에 깊은 동포애를 느꼈다”며 “남녘 동포들의 소중한 건강과 행복이 제발 지켜지기를 간절히 빌겠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청와대가 북한 통지문 직후 친서들을 느닷없이 꺼낸 것은 이번 피격 사건이 김정은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김정은이 직전까지 문 대통령과 이렇게 진솔한 친서를 주고받았다는 점을 앞세워 계획 살인이 아닌 우발 사건이었다는 북한 측 입장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유화적 인식은 같은 날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나온 문 대통령 연설에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군 장병 앞에서 “정부와 군은 경계태세와 대비태세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단호히 대응할 것임을 국민들께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희생당한 해수부 공무원 A씨 사건이나 관련된 대북 메시지는 전혀 내놓지 않았다.
여권도 “계몽군주” “이런 지도자 처음” “전화위복” “변화 실감”
김정은의 사과 표명으로 하루 만에 ‘규탄’에서 ‘기대’로 자세를 고친 건 청와대뿐이 아니었다. 다른 정부·여당 인사들도 앞다퉈 김정은의 사과 메시지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11월 미국 대선을 전후해 남북 대화가 재개될 것이란 희망을 내비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내리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25일 노무현재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된 ‘10·4 남북공동선언 13주년 기념 대담’에서 김정은의 사과 소식을 듣고 “유명을 달리한 A씨와 가족들에게는 굉장히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지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며 “김정일·김일성 시대와는 좀 다른 통 큰 측면(의 행태)”이라고 평가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같은 자리에서 “김 위원장 리더십 스타일이 그 이전과는 다르다”라며 “이 사람이 정말 계몽군주이고 어떤 변화의 철학과 비전을 가진 사람이 맞는데 입지가 갖는 어려움 때문에 템포 조절을 하는 게 아닌가, 제 느낌에는 계몽군주 같다”고 말했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통지문이 청와대에 온 것은 통신선이 사실상 복원됐다는 뜻”이라며 “이제 북측이 해야 할 것은 지난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이번 사건과 관련 정상 회동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같은 날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긴급현안 보고에서 “신속하게, 미안하다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사용하면서 북의 입장을 발표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며 “북한의 행동 준칙에 따라 사살했다고 하는 게 남북관계의 변하지 않은 냉엄한 현실을 드러냈다고 봤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변화가 있는 것 같다”고 기대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얼음장 밑에서도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남북관계 엄중한 상황에서도 북한에 변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가 사과하는 예가 거의 없다”며 “수령 무오류설을 감안할 때 두 번에 걸쳐 사과하고 이어 재발방지대책까지 통보했다는 건 진일보”라고 평했다.
‘이쯤에서 덮자’ 김정은 제안 받는 쪽으로 기우는 당정청
당초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A씨 생존 시간이 긴 상태에서 상부 지시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2008년 금강산에서 발생한 박왕자씨 피격 사건보다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했다. 가뜩이나 남북·북미 관계가 장기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상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우호 여론이 거의 없던 24일만 하더라도 청와대와 정세균 국무총리, 여야, 국방부, 통일부 등은 김정은의 사과만큼이나 이례적으로 입을 모아 북한을 규탄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건네면서 여론에 대한 관측이 한층 복잡해졌다는 분석이다. A씨의 ‘월북’ 여부와 시신 소각 등 각종 사실관계에 대해 정부와 북한 당국, 유가족 간 의견이 모두 엇갈리는 상황에서 김정은이 대뜸 ‘이쯤에서 덮자’는 제안을 해 온 셈이 됐기 때문이다.
북한 같은 유일영도 체제 국가에서 김정은의 사과 메시지가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외신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를 낼 정도로 “이례적”인 건 맞다. 김정은이 사과까지 한 마당에 진상을 더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북한을 몰아세울 경우 자칫 남북 대화의 불씨가 완전히 꺼질 수도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북한 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숙원으로 삼는 청와대와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에겐 큰 부담이다.
반면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납득할 만한 진상 규명도 없이 A씨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도 정상적인 절차는 아니다. 뚜렷한 규명 절차도 없이 북한과 우리 군이 추정하는 대로 A씨 사건을 ‘월북자의 불상사’로 결론 낸다면 정치적 역풍이 불 수도 있다. 결국 김정은의 사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전략과 A씨의 인권 사이에서 무엇을 최우선으로 두느냐는 이번 사건 수습의 핵심이 됐다.
현재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분위기는 김정은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과 정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1년8개월도 안 남은 상황에서 그간 이어온 대북전략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의견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친정부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는 이날 문 대통령과 김정은 간 친서가 공개되자 “두 사람의 진심이 느껴져서 울컥했고 눈물이 났다”는 글들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변수는 ‘여론’... 美트럼프·中시진핑 北문제엔 ‘침묵’
그럼에도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김정은 사과에 대한 여론 동향을 일단 중요하게 살피긴 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에 따라 김정은의 사과와 북한의 변명 사이에서 청와대와 여당, 야당의 대국민 설득 또는 여론전이 당분간 강하게 이어질 공산이 크다.
국내 여론과 함께 국제사회의 반응도 주목할 사항이다. 특히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미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미국의 시각을 살필 필요가 있다. 북미 대화의 키를 쥐고 있는 나라인데다 해당 사건이 추석 이후로 예상되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의 방한 때에도 언급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종전선언→평화협정 체결→항구적 평화체제’의 단계를 골자로 한다. 이를 위한 남북·북미 대화는 필수 전제 조건이다.
미 국무부는 이번 김정은 사과를 두고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평가하면서도 “동맹 한국의 규탄과 북한의 완전한 해명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완전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제시한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대한 단합된 대응에 있어 긴밀한 조율에 전념하고 있다”는 답으로 선을 그었다.
사건 전이기는 하지만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건 재임 중 처음이었다. 시 주석은 미중 갈등을 의식한 발언을 주로 내놓으며 한반도 문제 자체를 주요 의제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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