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회장은 ‘도쿄에 까마귀가 몇 마리냐’라든가 특이한 질문을 많이 했어요.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나 선견지명이 남달랐지요.”
진대제(68·사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은 27일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세상이나 기술이 이렇게 변할 테니 준비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지난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 비메모리 부문 대표에 이어 2000년 디지털미디어총괄 대표를 지냈고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에 발탁됐다. 2006년에는 ‘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며 사모펀드(PEF)를 창업해 현재 3조원 규모를 운용하고 있다.
그는 “이병철·이건희 회장은 무슨 일을 하면 철저하게 집념을 갖고 파헤쳤다”며 “이재용 부회장도 아버지랑 비슷한 점이 많아 어떤 주제에 깊이 있게 파고드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두 회장이 특이한 질문을 많이 던진 것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의 근원을 찾고 미래를 대비하자는 취지다. 그는 “이 부회장도 1995년께부터 아는데 ‘자동차가 밀리면 어떻게 합니까’라든지 특이한 질문을 던지더라”며 “아버지 못지않게 능력이 탁월하고 지적능력도 상당하고 판단력도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진 회장은 “회장님이 병상에 6년 넘게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한국 경제나 국제경제에 한 말씀 해주실 어른이 가셨다”며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며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따끔하게 말씀하던 때가 생각난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 회장은 1995년 김영삼 정부 당시 베이징특파원들과 만나 “행정력은 3류급, 정치력은 4류급, 기업 경쟁력은 2류급으로 보면 될 것”이라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진 회장은 “1994~1995년쯤 중국과 북한 투자에 관해 여쭤보자 ‘신중해라. 중국에는 잃어버릴 만큼 투자하고 북한에는 애국심만큼 투자하라’고 한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실제 중국에 불나방처럼 많은 기업이 달려들었지만 깡통 찬 곳이 적지 않고, 대북 투자 기업들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앞서 이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했을 때는 임원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가 돌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현지 호텔에 첫날에만 500여명이 모였는데 난리법석이었다. 회장님의 육성녹음을 듣고 있는데 새벽2시쯤 나타나 ‘한마디씩 하라’고 해 밤을 꼬박 새웠다”며 “‘품질에 대한 생각이 없다’며 질책하고 ‘대표와 임원 절반만 있어도 될 테니 1년씩 연수 가라. 뒷다리 잡는 사람은 됐고 인재가 필요하다’고 일갈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그는 “1988~1989년에는 ‘앞으로 디자인이 아주 중요해지니 이태리의 세계 최고 디자이너를 100만불(당시 7억~8억원)도 좋으니 데리고 오라’고 해 디자인 경영이 본격화됐다. 그때 사장 연봉이 1억원도 안 되던 시절”이라며 “1993년에 ‘자칫하면 3~5년 뒤 망한다’며 위기경영 시나리오도 만든 데 이어 이듬해 7·4제(7시 출근·4시 퇴근)를 실시하자 비로소 임직원들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소개했다.
이 과정을 거쳐 외환위기 당시 30대그룹 중 절반 가까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삼성은 오히려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외환위기 전후로 삼성전자도 반도체나 가전이 어려워 7만5,000여명 중 2만5,000여명을 구조조정하고 부천 비메모리반도체 공장을 매각하는 등 진통이 컸다”며 “기획·개발·제조·영업마케팅 등 기능별 조직을 ‘자율경영 사업부 체제’로 바꾸는 등 체질을 혁신적으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며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신경을 많이 썼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 여러 법적 문제에 얽혀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 그렇지,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능력에 대한 부분은 엉뚱한 걱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 예로는 2014년 방산업 매각과 2016년 9조원에 음향기업인 ‘하만’ 인수 등의 결단력을 보여줬고 바이오·인공지능(AI)·배터리 등 미래 성장동력을 적극 키우는 점을 들었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새롭게 요구되는 ESG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