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아트페어 개척 1세대로 1980년대 중반부터 현대화랑에서 업무를 익힌 박영덕(64·사진)은 1993년 강남구 청담동에 박영덕화랑을 개관했다. ‘화랑가=강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해외 아트페어에 주력하겠다는 도전장을 내민 그는 연간 최대 10곳의 해외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한국 미술의 ‘수출 역군’으로 활약했다. 작은 갤러리였지만 ‘물방울 그림’의 김창열,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을 간판으로 해외 시장에 연착륙한 박영덕화랑은 미국 시카고·LA·마이애미·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프랑스 피악(FIAC), 독일 쾰른, 스페인 아르코 아트페어 등을 누비며 김창영·도윤희·심수구·전광영·함섭 등 독창적 조형언어를 가진 한국 작가들을 해외 컬렉터들에게 소개했다. 안으로는 30~40대 젊은 작가 발굴에 공을 들여 2001년부터는 작가부스형 아트페어인 한국현대미술제(KCAF)를 기획해 매년 개최했다.
27년 전통의 박영덕화랑이 청담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이전하고, 갤러리 이름도 외국인이 부르기 쉬운 BHAK(비에이치에이케이)로 바꿔 ‘화랑 2막’을 선언했다. 경영 실무는 박영덕 대표의 장남 박종혁(27·사진) 대표에게 일임해 ‘2세 경영’을 시작한다. 1993년생으로 화랑과 동갑내기인 박종혁 대표는 미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다가 진로를 바꿔 졸업 후 한국화랑협회 말단 사원으로 취직하고, 이후 세계 최대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의 ‘아트 비즈니스’ 석사를 취득했다.
BHAK 이전 기념 기획전 ‘더 히스토리’는 화랑의 지난 역사를 압축해 보여준다. 1층에서는 윤명로·김창열·박서보·이우환·이승조 등 ‘블루칩’ 작가들의 전성기 작품이 펼쳐진다. 풍만한 인체로 정서적 풍요를 자극하는 페르난도 보테로 등 해외 작가도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은 박영덕 대표가 국내 전담 갤러리스트로 십수 년 함께 한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과 회화·드로잉으로 꽉 채웠다. 1991년작 ‘노스텔지어는 확장된 피드백’, 1996년작 ‘정지용’ 등 쉽게 만날 수 없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종혁 대표는 “개관전시가 갤러리의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신고식이라면 내년 첫 전시부터는 제 또래 밀레니얼의 취향을 겨냥한 기획전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일 것”이라며 “특징과 소재가 분명한 작가를 선호하는 것은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이면을 상상하게 하거나 라이브 퍼포먼스 능력, 팝적인 요소 등을 가진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 뒀다”고 말했다. 2018년 이후 미술 시장에서 밀레니얼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음을 눈여겨 본 박 대표는 “밀레니얼은 자신의 경험·시간을 돈과 교환할 줄 알고 투자와 수익성 또한 중시하는 세대”라며 “BHAK는 그런 수요를 채워주는 곳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전시장이 무용가부터 금융인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를 나누며 취향을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이 돼야 갤러리가 새 동력을 가질 수 있다”며 “신진과 원로작가, 온·오프라인의 균형감을 모색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 시장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코로나19로 경제 전반이 위축된 상황에서 새로운 시작을 결심한 것에 대해 박 대표는 “모두가 움츠리고 규모를 줄이는 이럴 때가 아니면 ‘치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한남동의 입지는 “강북과 강남을 잇고 서울 밖 도시와의 연결도 유리하며, 최근 갤러리들이 모여들면서 집적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는 이유가 작용했다. 삼성미술관 리움, 대림미술관 디뮤지엄을 품은 한남동에는 외국계 화랑 페이스갤러리를 비롯해 갤러리바톤, 수 등이 자리를 잡았으며 이태원의 박여숙화랑, 경리단길의 P21와 이알디(ERD) 등으로 이어진다. 가나아트 한남점과 나인원, 현대카드 스토리지 등의 전시공간이 주목받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