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스타트업이나 여의도 금융권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요. 돈도 잘 벌고 주도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같거든요. 거기다 화려하기도 하잖아요.”(28세 사무관 A 씨)
“행정고시를 왜 보는지 모르겠네요. 일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권한은 없고 책임만 크잖아요.”(33세 벤처캐피털 심사역 B 씨)
공무원이 떠나고 있다. 입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연차 사무관도, 이제 관록을 드러낼 과장도 직을 박차고 세종시에서 짐을 싸고 있다. 고시에 합격했다는 영광도 잠시다. 대기업에 비해 급여도 적고 청와대와 여당의 압박에 기껏 만든 정책이 뒤집히는 일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다. 더 이상 공직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5일 세종 관가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산업통상자원부를 나간 과장급 공무원은 10여 명에 달한다. 체력과 경험을 갖춘 공직 사회의 허리들, 그중에서도 소위 ‘에이스’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표를 던지고 나간 터라 부처 내 파급력이 컸다. 이직하는 곳은 학계·기업·법조계 등 다양하다.
이들이 퇴직을 결정한 것은 공직 생활이 예전만 못하다는 회의감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공직에 입문하면 국·실장으로 승진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요즘은 경쟁이 치열해지며 승진을 위해서는 상급자 비위를 맞춰야 하는 탓이다. 산업부의 한 서기관은 “통상 행시 50회 정도면 타 부처에서는 과장을 맡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산업부에서는 팀장 자리도 맡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언제 될지도 모르는 승진을 바라보기보다는 ‘민간에서 받아줄 때 가자’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단기 정책과 성과에만 매달리다 보니 중장기적인 정책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도 없다. 아이러니하게 참여정부를 이었다고 하는 문재인 정부보다 참여정부 시절이 더 낫다고 한다. 중앙부처 과장급 공무원은 “참여정부 시절 ‘비전2030’ 작업에 참여한 것이 공직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 그때는 밤새 일해도 나라의 중장기적 미래를 생각하며 큰 그림을 그린다는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며 “최근에는 단기적 성과 위주의 지시만 쏟아지고 눈앞의 일들을 처리하는 데 급급하다”고 말했다.
영원한 인기 부처인 줄 알았던 기획재정부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기재부를 떠난 공무원은 100명에 육박한다. 기재부는 1월 5급 공채 신임 사무관(65기) 희망 부처 1순위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굴욕도 당했다. 기재부 내부에서는 이 같은 기재부 기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재부 관계자는 “몇 년 새 정치권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기재부의 정책 기획이나 조정 능력 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조직 규모가 타 부처 대비 큰 데다 산하기관으로의 이동이 쉽지 않아 인사 적체가 심한 것도 기피 부처로 전락한 원인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이른바 MZ 세대라고 불리는 1990년대생 사무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입부 5년도 되지 않은 초임 사무관 동기 400명 중 6~7명이 그만뒀다. 2010년까지만 해도 5급 공무원은 임용 10년 이내 퇴직자가 전무했다. 심지어 행시의 꽃으로 꼽히는 재경직 사무관조차 미래를 찾지 못하고 대학원과 로스쿨 진학 등을 이유로 사표를 던진다. 산업부에서는 지난해부터 근무한 2년 차 사무관 중 5명이 퇴사했다. 관심 분야를 살려 벤처캐피털 투자자로 전업한 경우도 있지만 행시 합격 경력을 살려 공직적격성평가(PSAT) 강사로 나서기도 한다. 반영되지도 않을 국가 정책을 매일 야근하며 짜는 것보다 속 편한 학원 강사가 낫다는 것이다.
특별공급 제한 정책은 세종시 집값 폭등과 맞물려 신임 사무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신규 사무관은 세종시 조성 후에 임용됐기 때문에 사전에 직장이 세종시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특별공급 혜택을 받지 못한다. 국·과장급의 선배 공무원들처럼 특공 혜택은 누려보지도 못한 데다 그나마 서울보다 집값이 저렴해 비교적 이르게 정착할 수 있던 장점조차 없어진 것이다. 기재부의 한 서기관은 “급등한 세종 아파트의 공시지가로 크게 오른 세금 이야기를 하다가도 신임 사무관들이 오면 입을 닫는다”며 “눈치가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아 몸값이 크게 높아진 개발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과 명예 모두 가진 스타트업 창업자의 이야기도 1990년대생 사무관의 마음을 흔든다. 한 재경직 사무관은 “많지 않은 월급으로 월세를 내며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서울 여의도나 강남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며 “이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둘러보다 보면 ‘나는 세종에서 뭐하고 있는 건가’라는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세종=우영탁 기자 tak@sedaily.com, 세종=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