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 시간) 백악관 반도체 공급망 회의에 직접 참석해 반도체를 비즈니스가 아닌 국가적 안보 문제로 보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미국 정부는 이번 회의를 통해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업체들에 자국이 구축하고 있는 반도체 ‘가치 동맹 밸류체인(AVC)’에 참여하라는 시그널도 보낸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는 단순히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라는 요구뿐만 아니라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미래 산업에서 경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압박을 받은 것이어서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美 중심 반도체 동맹 들어와라 ‘압박’
현재 미국 정부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을 기점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설계 능력 대비 제조 능력이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미국으로서는 밸류체인을 구축해 자국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반도체를 공급하도록 유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기업들이 공급받는 첨단 반도체의 상당량이 중국과 인접한 대만에서 제조된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큰 위협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이번 회의 후에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업체들에 자국 AVC에 참여하라는 압박을 강화할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중국 기업들에 반도체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 반도체 공장까지 두고 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은 “일단 미국의 이야기를 잘 들어봐야 하겠지만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라며 “중국이 나중에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확장하라는 요구를 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고 진단했다.
美 NSC 출동해 ‘반도체 안보’ 강조
미국 정부가 중국과의 대결 구도까지 만들면서 공급망 구축에 나선 것은 반도체를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에는 바이든 대통령 외에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지나 러만도 상무장관 등 주요 인물이 총출동했다. 특히 이번 회의에 미국의 안보 정책을 설계하는 국가안보보좌관이 참석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의 반도체 문제를 산업적인 측면이 아닌 안보 문제로 보는 미 정부의 시각이 참여 인사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미국은 앞서 지난 2일 열린 한국·미국·일본 안보실장 회의에서도 반도체를 안보적 관점으로 보는 시각을 드러냈다. 12일 백악관 회의에도 참석한 설리번 보좌관이 이날 회의 때도 미국 대표로 참여해 반도체 공급망을 역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회의 직후 관계자를 인용해 “한미일 3국이 반도체 제조 기술의 미래에 중요한 핵심 열쇠를 가지고 있다”며 “민감한 공급망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 美 공장 증설 요구
미국 정부가 당장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미국 내 공장 증설이다. 일자리가 창출될 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는 구글·애플 등 정보기술(IT) 기업은 물론 포드와 같은 자동차 회사 등 자국 기업들에 우선 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김 단장은 “미국에 투자해 공장을 세우라는 압박이 가장 클 것”이라며 “현재는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파운드리 공장만 갖고 있는데, 메모리도 자국 내에서 생산하라는 압박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삼성전자의 경우 현재 텍사스주와 애리조나주·뉴욕주 중 한 곳에 최소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각 지방정부와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를 두고 치열한 협상을 진행 중인데 백악관의 압박이 거세질 경우 의도치 않게 투자 시점을 당겨야 하는 난관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반도체뿐만 아니라 배터리 등 다른 산업에서도 자국 내 생산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압박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백악관은 현재 반도체 부족이 가장 심각한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자국에서 해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수익성 등을 고려해 미국 공장에서는 차량용 반도체를 소량만 만드는 삼성전자로서는 피해를 감수하고 생산 전략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경운 기자 clou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