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 중순 삼성전자 사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누운 문자 이모티콘’이 담긴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측이 개선하지 않는다면 드러눕겠다’는 주장을 글보다 재치 있는 이모티콘 하나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모티콘이 담긴 글들은 수십여 개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어떤 구호와 장황한 비판의 글보다 인상 깊었다”며 “젊은 세대와 어떻게 노조를 이끌어야 하는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20~30대 직원인 MZ세대가 새로운 사무직 노조를 결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존 생산직 노조의 소통과 요구 방식에 대해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 파업과 투쟁으로 대표되온 생산직 노조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분석이다. MZ세대가 중심이 된 사무직 노조는 투명한 임금·성과급 체계 공개를 목표로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노조와 달리 호봉제 폐지를 주장하고 정년 연장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기업들은 기존 노조와는 다른 MZ세대 중심의 새로운 노조 문화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생산직 노조와는 별도의 협상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27일 노동계에 따르면 지난 3월 들어 사무직 노조 대열에 합류한 기업은 LG전자·금호타이어·현대차그룹이다. 현대중공업·넥센타이어도 조만간 노조를 만든다. 특히 무노조 경영을 파기한 후 등장한 삼성전자 노조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전국삼성전자노조의 조합원은 출범 17개월 만에 10배나 늘어 4,000명이 됐다. 30대가 58%, 20대가 20%로 다른 사무직 노조처럼 MZ세대가 주축이 됐다.
경영계와 노동계 모두 MZ세대 사무직 노조의 등장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반응이다. 올해 SK하이닉스와 현대차그룹의 성과급 논란이 일었을 때 오너가 직접 나선 게 단적인 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급여를 반납했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직원들과 마주했다. 그동안 생산직 노조와의 협상 전례에서 보면 이례적으로 경영진이 빨리 대응했다는 평가다. 정보기술(IT) 신생 기업이 잇달아 높은 연봉으로 인재 유치에 나서면서 경영진 스스로 빠른 소통의 중요성을 자각했다는 분석이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젊은 직원은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때가 많다”며 “이미 노조뿐 아니라 다양한 소통 창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 생산직 노조는 MZ세대 사무직 노조의 이런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생산직 노조는 여전히 결성부터 중요한 의사 결정은 노조 간부가 모인 대면 회의를 거쳐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사측 간섭을 피해 노조 활동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중요 결정은 소수가 먼저 공유한다는 직원들의 불만도 있었다. 반면 MZ세대 사무직 노조는 다양한 의견을 빠르게 모아 결정할 방침이다. 온라인으로 조합원을 모으고 온라인 중심으로 소통할 방침이다. 양대 노총의 한 관계자는 “아직도 전국 지부장의 연령대를 보면 대부분 50대로 젊은 세대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노조가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데 소홀했다”고 말했다.
MZ세대 사무직 노조는 ‘요구-협상-결렬-파업’으로 이어지는 기성 노조의 관행과 노조 특권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현재 사무직 노조들은 양대 노총을 가입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다는 방향성을 내비치고 있다. 양대 노총 가입이 조직화 측면에서는 수월하지만 세력화에 따른 폐단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노조 경영 파기 전 노조가 없었던 삼성전자 노조의 경우 한노총 산하다. 하지만 제1 원칙은 ‘특권 없는 노조가 되겠다’며 기존 노조 관행에서 탈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문가들은 MZ세대 노조의 등장을 반기고 있다. 관건은 조직화다. 김강식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노동운동이 현장 중심으로 움직이다 보니 사무직은 여러 측면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고 제 목소리도 못 냈다”며 “MZ세대 노조는 투쟁보다는 교섭을 통해 실리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기존 (생산직) 노조보다 약한 조직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건강하고 새로운, 경쟁적인 노조가 등장해 노조의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며 “사 측도 직종 특성을 고려해 교섭 단위를 분리하는 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종=양종곤·이수민·방진혁 기자 ggm11@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