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해 잘 모르겠다. 한국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미국 이민 1.5세대로 외교관을 꿈꾸던 UCLA 정치외교학과 3학년 강형원이 지난 1984년 리처드 바움 교수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당시 외교고문을 했던 바움 교수는 중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중국에 관해 해박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무의미하게 치부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미국 이민을 왔지만 평생 한국 이름을 고수한 그로서는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에 좌절감을 느낀다. 지난해부터 기자와 총 세 차례 인터뷰를 한 그는 “교수와 학생들이 소련과 중국에 관해서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한국 역사와 문화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았다”며 “오늘날 세계적인 BTS 열풍 등 한류 바람을 보면 격세지감이기는 하나 아직도 서양에서 일본과 중국의 역사·문화 왜곡이 적잖게 통하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전했다.
-44년간 美서 사진기자·데스크로
중1때 美 이민…LA타임스서 첫발
폭동 현장 누비며 한인 위상 높여
AP서 '클린턴 스캔들' 취재 지휘
백악관서 정권 교체 과정도 기록
미국 유수 언론사 세 곳에서 사진기자와 데스크를 하며 퓰리처상을 두 번 받고 2019년 프리랜스 포토저널리스트로 인생 2막을 연 강형원이 요즘 한국의 역사·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배경이다. 그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된 세 아들을 미국에 둔 채 매일 한국 곳곳을 누빈다. “서구에서는 한국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중 하나로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진 나라로 보는 사람이 많죠. 우리가 5,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 민족이라는 것을 바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44년을 미국에서 살았던 포토저널리스트가 서구에 소개하고 싶은 한국의 역사·문화는 뭘까.
우선 그는 의미 있는 인류의 역사가 한반도에 다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울산 울주 암각화를 탐방해 약 7,000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배를 타고 작살로 고래 사냥을 한 증거가 한반도에 있음을 소개한다. 암각화에는 수렵이나 어로 모습은 물론 고래·사슴·호랑이·표범, 거북·물개·물고기, 조류 등 300점 이상이 새겨져 있다. 7,000여 년 전 마치 개처럼 사람 표정을 잘 읽는 제주마와 사람의 발자국 화석을 선보이며 몽골마와 섞여 우수한 잡종이 됐다는 점도 전한다. 서양의 고대성을 보여주는 거석기념물로 영국의 스톤헨지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청동기 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며 2,000여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는 전북 고창 등의 고인돌을 보여준다. 유기상 고창군수는 “고인돌은 무덤뿐 아니라 제단, 별자리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성대, 신앙의 대상물, 부족의 경계 표시로도 쓰였다”고 설명한다.
강형원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문화 왜곡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중국이 지난해부터 김치가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현실에서 김장 현장을 찾아 제조법은 물론 유래까지 파고든다. 중국은 고조선·고구려·발해사에 이어 김치·한복·판소리·아리랑·삼계탕 등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한 TV쇼에서 태극기도 중국인이 만들었다고 해 큰 논란이 됐는데, 그는 태극기에 우리 조상인 동이족이 만든 동양 음양 사상의 상징이 들어 있다는 것도 소개한다. 사찰을 찾아 인도나 중국과 비교해 한국처럼 불교가 정착되고 화려하게 꽃피운 곳이 없다는 말도 한다. 역사적·실효적으로 우리 영토인 독도를 탐사해 일본의 허위 주장을 생생하게 꼬집기도 한다. 독도를 다녀온 김에 1948년 미국 공군의 독도 폭격으로 숨진 수십여 명의 어민 위령비도 소개한다. 1948년 제주 4·3항쟁 현장을 답사하며 해방 이후 3년간 미군정이 한국 실정에 무지해 통일조국을 원했던 제주인들에 대한 경찰과 서북청년단·군인들의 대량 학살을 방조하고 지휘한 뼈아픈 역사도 고발한다. “제가 국적이 미국이고 현지 주류 언론사에서 30년 넘게 활동했는데 한국의 역사·문화를 객관적으로 서구 사회에 소개하자는 것입니다.”
강형원은 과거 ‘한민족이 세계사에 공헌한 게 없다’는 일본 학자의 글을 보고 격분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를 조명하며 근대 활판인쇄술의 발명자로 규정된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보다 80여 년 앞섰다는 점도 강조한다. 경주 왕릉의 페르시아인 석상 등을 보여주며 우리가 오래전부터 서역과 교류한 증거로 들이민다. 그는 “서양인들은 실크로드가 중국까지만 연결된 줄 아는데 우리는 고조선 때부터 초원로를 통해 서역과 교역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의 멋진 도자기들을 소개하며 실상 일본이 수백 년 전부터 유럽에 수출했던 도자기가 임진왜란 당시 우리 도공들을 강제로 끌고가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는 점도 밝힌다. 코끼리와 원숭이가 그려진 백제의 금동향로를 비추며 백제가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왜를 제후국(담로)으로 뒀고 지도층이 현지로 넘어가 주류 세력이 됐다는 점도 전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지가 발견된 우리 왕벚꽃 이야기를 하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널리 퍼진 일본 왕벚꽃과 비교하기도 한다. 전북 임실·장수의 가야 유적을 찾아 3국 시대가 아닌 4국 시대를 소개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풀리면 고조선과 고구려·발해 유적지도 찾는다는 포부다.
그는 “해외 이주 한인이나 입양인, 심지어 한국인들도 상당수가 우리 역사·문화를 잘 모른다”며 “생동감 있는 사진에 영어와 한글로 된 역사·문화 콘텐츠를 많이 올려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실제 외국인 중에는 ‘놀라운 역사·문화를 알려줘 흥미롭다’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41편의 우리 역사·문화를 서울경제 자매지로 미주 한인들에게 영향력이 큰 미주한국일보에 매주 한 면씩 연재하고 소셜미디어에도 올리고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그는 미국에서 과연 어떤 길을 걸었을까. 그는 불도저 기사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중1 때 LA 한인타운으로 이민을 간다. “아버지는 현지에서도 불도저 기사를 하며 4남매를 교육하셨죠. 저는 인종차별의 벽을 극복하기 위해 현지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지려 일부러 이민 다음 해 백인이 많은 학교로 옮겼어요. 그러다 고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카메라를 사준 것이 포토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은 계기가 됐네요.” 이후 그는 UCLA에 들어가 주 5일 매일 36면을 발행하던 대학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1·2학년은 물리학과를 다니다가 외교관의 꿈을 품고 3학년 때 정외과로 옮긴다. 하지만 4학년 때 LA타임스에서 한 학기 인턴을 하며 본격적으로 사진기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신문은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100만 부 이상(평균 110면) 발행하던 전국지였죠. 사진기자한테 2년마다 새 차를 지급했는데 차에서도 신문사 독점 주파수 무전기로 데스크와 통화를 할 수 있었죠.”
그는 1992년 흑인들의 LA 폭동을 취재하며 한국어 통역도 하고 한인들이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선 사진을 찍어 미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다. LA타임스 폭동취재팀이 퓰리처상을 받게 하는 데 적잖은 공을 세운 것이다. 그는 “한인들은 1880년대부터 미국 철도 건설에 투입돼 인권 침해를 당한 중국인이나 1942년 일본군의 진주만 미군 공습 이후 강제 수용된 일본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며 “라디오코리아를 통해 폭도의 동선을 교환하며 용감하게 총을 들고 순순히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미국 주류 사회에서는 한인들의 굳센 의지가 미국 개척 정신에 부합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한인들이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자 코리안아메리칸한미연합회를 만들었고 지금의 한인 위상은 당시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LA타임스에 있을 때 이런 일화도 있다. 1990년대 초 LA에서 진도개 잡종이 사람과 고양이를 무는 바람에 진도개가 맹견 리스트에 오를 뻔했으나 그가 순종을 키우며 화보기사를 내며 순종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어필해 잘 해결된 적도 있다. 당시 개설한 진도개 웹사이트는 지금도 운영 중이다. 그는 2010년 로이터 근무 시절에도 삽살개 등을 서구에 소개하며 일제가 군용모피용으로 진도개만 빼고 수십만 마리의 토종개를 죽인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대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북한이 미주한인관광단을 받을 때 평양·원산·금강산·묘향산·평성·개성·판문점을 취재하기도 했다. “시대를 거슬러간 듯했지만 정서는 남한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게 그의 느낌이다.
1997년에는 미국 정책 결정 과정과 동부 문화를 접하고 싶어 워싱턴DC의 AP통신으로 옮긴다. 다음 해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과 하원의 탄핵 청문회를 1년여 심야 취재까지 지휘하며 사진부가 1999년 퓰리처상을 받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는 “당시 무엇이 어떻게 비쳐지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야당과 특검이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데도 화 안내고 여유 있게 대처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2000년 가을부터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취임 초까지 6개월간 백악관 사진부에서 근무하며 정권 교체 과정을 기록해 국가기록보관소로 넘겨준 뒤 2001년 로이터통신으로 옮겨 2019년까지 근무한다. 그는 “당시 샌디 버그 국가안보보좌관이 조금만 시간이 있었으면 북한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며 “부시 때 첫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이 김대중 대통령한테 너무나도 미안해하던 표정도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로이터에 있을 때도 그는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 정치인이나 문화·예술인 등을 모두 찍어 로이터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했다. 이 중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빛정책(대북 포용 정책)을 목이 쉴 정도로 역설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언론사에 몸담으며 한국에 관해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늘상 구성원들에게 일깨워주고는 했다”면서 “이제는 아예 우리 역사·문화를 의미부여해 전할 수 있어 보람이 더 크다”며 활짝 웃었다. /사진제공=강형원
he is… ▲1963년 고창 ▲1977년 미국 이민 ▲1987년 UCLA 정외과 ▲1987~1997년 LA타임스 사진기자·1면에디터 ▲1993년 퓰리처상(LA폭동 취재팀) ▲1995년 방북 취재 ▲1997~2000년 AP통신 워싱턴 사진 총괄에디터 ▲1999년 퓰리처상(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 사진취재팀) ▲2000~2001년 백악관 사진부 ▲2001~2019년 로이터통신 수석사진기자·북미데스크에디터 ▲2019년~ 프리랜스 포토저널리스트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