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 속 반도체 패권 다툼이 본격화되면서 ‘국정농단’ 혐의로 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 사면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고 있다. 특히 백신 확보, 코로나19 이후 경제 회복이 정권 재창출과 정권 교체를 가를 주요 화두가 되면서 여권은 물론 청와대까지 자세를 고쳐 잡는 분위기다. 사면권을 쥔 문재인 대통령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던 기존 청와대 공식 입장을 깨고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며 사면 가능성을 열었다. 일각에서는 조기 가석방이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제기된다. 다만 이른바 ‘재벌개혁’ 요구와 ‘불법승계’ 여부를 다투는 또 다른 재판의 존재는 사면 논의에 여전히 큰 부담이라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 사면은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과 곧 시작될 차기 대선 정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여론의 향배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보선 이후 여권에서도 ‘사면론’ 군불…‘조기 가석방설’까지
지난 1월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서 법정구속된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여론은 정·재계에서는 사실 일찍부터 형성돼 있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는 상황인 데다 미국산 백신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그의 역할론을 강조한 주장들이었다. 최고경영자(CEO)로서 이 부회장이 갖춘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와 존재감은 다른 전문경영인들과는 비교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구속 직전까지 백신 특사로 출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주요 경제5단체장은 지난달 26일 이 부회장 사면을 청와대에 공동 건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심지어 여권에서도 이 부회장 사면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분기점은 역시 정부 비토 여론을 확인한 4·7 재보궐 선거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일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경제가 불안정하고, 반도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이 이 부회장의 사면을 요구하고 있다”며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제대로 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삼성전자 임원 출신인 양향자 민주당 의원 역시 최근 국민적 동의를 전제로 한 ‘조건부 사면 논의’를 제안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후보자 시절이던 지난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미래 먹거리의 핵심 키인 반도체 문제, 글로벌 밸류 체인 내에서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경쟁력이 있는 삼성그룹에 대해 배려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있다”며 “국무총리에 취임해 경제계를 만나게 되면 그분들이 갖고 있는 상황 인식을 잘 정리해 대통령께 전달드리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사면에 앞서 조기 가석방 필요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부회장 가석방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가석방 심사에는 국민의 법감정과 공감대가 고려된다. 이재용씨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靑 “검토 계획도 없다”→文 “국민 의견 많이 듣겠다”
재계에 이어 여야까지 이 부회장 사면을 압박하자 청와대의 기류도 달라졌다. 코로나19 이후 기업 경쟁력 회복이 우선이라는 여론에 ‘시기상조’에서 적어도 ‘검토 가능’ 정도로는 전환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1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취임 4주년 특별연설·기자회견에서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한 질문에 “형평성, 과거의 선례, 국민 공감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다만 “지금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되고 있어 우리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더욱더 높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며 “충분히 국민들의 많은 의견을 들어 판단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이날 연설에서 ‘경제’라는 단어를 48번이나 언급하며 “적극적 확장 재정으로 올해 4%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하는 데 정부 역량을 총동원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대통령이 결코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여론에 공을 넘긴 점도 주목할 부분으로 꼽혔다. 여론만 형성되면 문 대통령이 이 부회장 사면을 마지못해 결심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있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특히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의견을 많이 듣고 있다”며 “경제계뿐만 아니라 종교계에서도 사면을 탄원하는 의견들을 많이 보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최근까지 사면 검토 가능성조차 부정했던 청와대의 공식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 해석됐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지난달 27일만 해도 기자들에게 “현재까지 사면을 검토한 바 없으며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관계자는 지난 4일에도 같은 질문을 던진 기자들에게 “현재로서는 (4월 27일 내놓은 답변과)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답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도 방문…한미회담 경제사절단 동행
문 대통령은 이후 이달 13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시설을 방문해 관계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반도체 현장 방문은 취임 후 5번째였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세계 각국은 자국 위주의 공급망 재편에 뛰어들며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을 선제적 투자로 국내 산업 생태계를 더욱 탄탄하게 다지고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해 이 기회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또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의 시대로 옮겨갔다”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보조금 지원, 세제 혜택 등 파격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우리 정부도 반도체 강국을 위해 기업과 일심동체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시스템반도체까지 세계 최고가 돼 ‘2030년 종합반도체 강국’의 목표를 이뤄내겠다”며 “반드시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승리하겠다. 기업의 노력을 확실하게 뒷받침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반도체 문제는 21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역시 CEO급 인사가 이 회담에 동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는 한미정상회담에서 백신 파트너십을 논의한 뒤 미국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국내 위탁생산(CMO)을 결정할 수 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지난 14일 “현재 확정된 바 없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삼성이 백신 수급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할 가능성을 여전히 남긴 것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청와대 참모 회의에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을 국민들이 감상할 수 있게 별도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설치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의 기증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한편 작품 면면을 들여다보며 놀라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국민 70%는 사면 찬성…朴·MB보다 우호적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한 국민 여론은 의외로 대부분 우호적인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여론조사가 진행됐는데 대체로 국민 70%가량이 사면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제는 이 부회장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국정농단 책임보다 경제회복 역할에 더 쏠려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0∼12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 부회장의 사면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64%에 달했다. ‘반대한다’는 의견은 27%에 그쳤다. 모든 연령·지역에 걸쳐 사면에 찬성하는 여론이 반대 의견보다 많았다. 시사저널이 11일 시사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2%포인트)에서는 응답자 76.0%가 이 부회장의 사면에 찬성했다. 이 부회장 사면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21.9%에 불과했다.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의뢰로 지난 8~11일 진행한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도 전체 응답자 중 68.4%가 사면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반대한다는 의견은 25.7%에 그쳤다. 윈지코리아컨설팅이 아시아경제의 의뢰로 지난달 24~25일 조사한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역시 ‘이 부회장을 사면해야 된다’는 응답은 전체의 69.4%에 달했고, 사면 반대 응답은 23.2%에 불과했다.
데이터리서치(DRC)가 쿠키뉴스의 의뢰로 4월26일 진행한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는 응답자의 71.2%가 이 부회장 사면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사면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26.2%로 집계됐다. 알앤써치가 데일리안의 의뢰로 4월19~20일 실시한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0%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또한 8·15 광복절 이 부회장 사면 찬성 의견이 70.0%를 기록했다. 사면 반대 의견은 26.0%로 나왔다.
이는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여론보다 훨씬 우호적인 수준이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등 4개 기관이 지난달 26~28일 조사한 결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두고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는 응답(52%)이 ‘국민 통합 차원에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응답(41%)을 오차범위 밖에서 웃돌았다.
‘유전무죄’ ‘승계의혹’ ‘재벌개혁’ 논란은 부담…文 고심 깊어질듯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 시기·형태로는 8월15일 광복절 특별사면이 가장 자주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경쟁에 대한 시급성 문제로 그보다 조기에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부회장을 사면할 경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이 또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점은 큰 부담이다. 더욱이 현 정부는 ‘재벌개혁’을 공정성의 화두로 삼고 출범한 만큼 보수 정권보다 재벌 사면에 더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1심 재판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것도 고민 지점이다. 대통령의 이 부회장 사면이 자칫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형평성과 전례를 언급한 것도 이런 우려를 감안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통령 등 다른 국정농단 연루자들이 여전히 수감 중인데 이 부회장에 대해서만 사면을 논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고려할 부분이다. 전직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서는 최근 문 대통령의 발언에 온도 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1월 신년 기자회견 때만 하더라도 두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한 질의에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고 재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사면을 요구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상식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는 연초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사면론을 꺼냈다가 당원들에게 호되게 비판을 받은 직후였다.
그러다가 재보선 직후인 지난달 21일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는 “국민 공감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강경 발언을 자제했다. 10일 기자회견에서도 “국민 통합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하면서 판단해나가겠다”며 일단 가능성은 열어뒀다.
경제회복과 재벌개혁 사이에서 사면권자인 문 대통령의 고심은 당분간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에서 이 부회장 사면이 갖는 정치적 파급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문 대통령 판단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