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의창만필]그 많던 보리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수찬 힘찬병원 대표원장






아주 어릴 적 친구 집에 가서 밥을 먹은 일이 있다. 평소 먹던 쌀밥과는 달랐다. 밥알 가운데 줄이 하나 있고, 색깔도 노리끼리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반찬이 달랑 깍두기 하나뿐이었는데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여쭤보니 내가 먹었던 밥이 보리밥이라고 알려주셨다. 보리밥은 소화도 잘되고, 방귀가 잘 나온다는 설명도 해주셨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보리밥을 많이 먹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보리밥은 서민들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비록 깍두기나 김치 반찬 하나에 보리밥을 먹어도 배만 부르면 행복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예전처럼 집에서 보리밥을 먹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건강을 위해 쌀밥보다 식이섬유가 많은 보리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쩌다 한 번 별미로 보리밥 전문 식당에 가서 먹곤 한다. 이제 보리밥은 풍요의 시대에 잊혀가는 추억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보리밥을 주식으로 먹던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다.



먹을 것도 넘쳐나지만 의료 혜택도 넘친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처럼 의료보험제도가 잘돼 있는 나라도 드물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1~2년마다 무료로 건강검진을 해서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치료비도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부담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게 된 것은 다 이런 의료보험제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의료 서비스가 얼마나 선진적이고, 얼마나 싸고 좋은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등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대사성 질환의 경우 병원 진찰비와 약값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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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찰비와 약값이 부담스럽다고 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물론 개인 사정에 따라 몇천 원도 힘겨울 수 있으니 속단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진찰비와 병원비는 아까워하면서 건강을 위해 비싼 건강 보조 식품이나 보약을 사는 데는 기꺼이 지갑을 여는 분들을 보면 씁쓸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건강에 관심이 많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건강에 관심이 커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소득이 비슷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더 많은 편이다. 어쩌면 워낙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던 시절, 아파도 제대로 병원 한 번 가지 못했던 기억이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건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병원비는 아까워하면서 영양제나 건강 보조 식품, 보약 등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영양제나 건강 보조 식품은 말 그대로 건강을 보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식품일 뿐이다. 병을 예방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일단 병이 나면 적절한 병원 치료를 받는 것이 먼저다.

주변을 돌아보면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성인병 진단을 받고도 약을 처방 받아 먹는 대신 건강 보조 식품이나 민간 요법으로 관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한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하는 게 싫고, 약을 오래 먹다 보면 부작용이 생기는 게 걱정스럽다는 이유다. 요즘엔 약이 많이 좋아져 장기 복용해도 안전하다. 그런데도 효과가 분명하고 안전한 약을 거부하고 무조건 건강 보조 식품만 맹신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최근 들어 헬스 시장을 비롯한 건강 보조기 시장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물론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병원 치료와 함께 운동을 병행하면 효과는 배가 되고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진다. 하지만 적절한 치료 없이 운동만으로는 병을 치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 건강 보조 식품처럼 헬스 기구나 건강 보조기 역시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자꾸만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병원이 제 기능을 못해서일까라는 자책 섞인 자문도 해보며 거꾸로 가는 세상 속에서 가을밤 고민이 깊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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