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관에 대한 호암 이병철 회장의 애정은 정말이지 각별했다. 매일 아침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재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아꼈다고 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회고했다. ‘대가야’가 위치했던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국보 ‘가야 금관’이다. 5세기쯤 제작된 유물로 추정되는데 온전한 형태를 갖춘 가야금관으로는 유일하다. 신라 금관의 사슴뿔·나뭇가지형 장식과 비교하면 왜소한 듯하나 화려함과 크기가 전부는 아니었다. 이 가야금관은 특유의 형태, 쉼표 모양의 나선문 등 여러 측면에서 시베리아 초원의 기마민족이자 일찍이 철기를 사용한 스키타이 문명과의 관련성을 가진다. 북방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쪽 끝 가야로 이어지는 철기 문화 등 문명의 연결고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유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대구 비산동 출토의 삼한시대 청동검도 마찬가지다. 초기 철기시대인 기원전 1세기 유물로, 칼끝이 뾰족한 세형동검이며 칼자루 끝 장식에 오리 모양의 물 새 두 마리가 마주 보는 형상이다. 새를 소재로 삼은 것 또한 북방 스키타이족의 특성이다. 이 동검은 몸체가 둥글고 불룩한 중국식 동검보다 더 날렵한 ‘한국식 동검’이다.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되 우리식으로 발전시켰다는 의미다. 고대의 청동기,철기, 금 가공술은 지금의 ‘반도체’ 같은 최신의 기술이었다. 호암은 이 유물들을 보고 또 들여다보며 선진 기술을 민첩하게 수용하고, 그것을 고유한 우리 것으로 발전시켜 세계를 제패할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이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휴관했다 1년 7개월 만에 재개관 하며 야심찬 기획전 ‘야금(冶金)’을 선보였다. ‘야금’은 광석을 채굴해 금속으로 가공하는 일련의 기술을 통칭하는 것으로, 전시는 한반도 금속예술의 역사를 관통해 오늘로 잇는다. 지난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내년 40주년을 앞두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과감히 공사중인 속살을 드러냈다. 지난 4월 고 이건희 회장이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작품 2만 3,000여 점을 유족이 국가에 기증하면서 ‘이건희 컬렉션’이 뜨거운 화두가 됐는데, 그 시작이 부친 이병철 회장의 영향이었고 모태가 된 곳이 호암미술관이라는 점에서도 이번 전시는 각별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의 기획전이 인간의 근본에 대해 질문하고, 호암미술관의 전시가 자연을 극복하고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킨 인간의 활동사로 응답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였던 국보 ‘가야금관’이 나왔고 현존하는 최대 크기의 한국식 동검인 ‘비산동 세형동검 및 동모’가 최초로 공개됐다. 국보 5점과 보물 2점 등 문화재 31점 외에 이우환·서도호·양혜규 등 현대미술가의 작품 9점을 함께 선보여 현대미술과 고미술의 융합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전통과 현대의 공존을 모색하는 호암미술관의 향후 방향성을 암시한다.
전시의 시작은 금속을 제련하는 불을 암시하는 김수자의 영상 ‘대지의 공기’이다. 과테말라 활화산을 촬영한 흙·불·바람의 움직임을 통해 생성과 소멸, 발전을 이야기 한다. 청동거울과 금관, 정교한 장식의 금귀걸이 등 금속의 반사성으로 반짝이는 유물들은 이것을 가진 인물의 막강한 권위를 드러냈다. 4~5세기 가야 유물인 ‘철제 갑옷’ 등 상징적이던 금속에 실용성이 더해졌다.
여기에 불교를 향한 신앙심이 가미돼 금속공예는 최고조로 발전한다. 은에 도금해 제작한 14세기 고려 불상인 ‘은제 아미타여래 삼존좌상’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전시를 기획한 이광배 호암미술관 책임연구관은 “금과 수은을 섞어 청동주물에 바르는 아말금 도금법으로 천년이 지나도 금이 안 벗겨지는 놀라운 기술력”이라고 극찬했다. 청동 몸체에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은을 넣고 가공한 국보 ‘청동 은입사 봉황문 합’ 또한 11~12세기 고려 공예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연구관은 “표면에 그림을 그리고 그 안을 다른 재료로 채워넣는 기법이 도자기에 적용돼 상감청자가 되고, 나무에 사용돼 나전칠기로 발전하는 등 한국미술의 바탕에 금속미술이 있었다”면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면서도 매끈한 표면을 갖는 것 또한 놀라운 기술”이라고 평했다.
지난 1948년 강원도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선림원종’(804년)은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 이를 원광식 주철장이 전통 방식으로 되살린 종이 함께 전시됐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현대미술 전시에서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존배의 작품 ‘원자의 갈비뼈’가 소장품으로는 처음 전시됐다. 리움 기획전에 선보인 적 있는 서도호의 ‘우리 나라’는 1.5㎝ 크기의 인물상 2만3,000여 개로 우리나라 지도를 이룬 대작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일군 이름없는 군중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지난 2006~2012년 리움 앞마당을 차지했던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표작 ‘마망’이 호암미술관 야외로 옮겨왔다. 이 또한 청동, 즉 금속 작품이다. ‘야금’전은 12월12일까지 열리고 ‘마망’은 상설 전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