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요리사들은 레시피를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불문율에 가깝다. 기껏해야 자녀를 비롯한 직계가족 정도에게 물려줄 뿐이다. 그나마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다. ‘아무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라는 유명 광고 카피가 이를 대변한다.
2년 전 이런 금기를 깬 이가 나타났다. 지난 2002년 대한민국 조리 명장에 오른 이상정(68) 청운대 초빙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얼마 전 청운대를 정년퇴직함과 동시에 평생 연구해온 요리 레시피와 각종 저서, 기록물들을 한국조리박물관에 기증했다. 6일 서울 롯데백화점 잠실점 반찬 가게 ‘마스터쿡’ 매장에서 만난 이 명장은 기증 이유를 “자신이 개발한 레시피가 사장되는 것이 싫어서”라고 밝혔다. 그는 “레시피를 벽장이나 금고 속에 처박아 놓으면 자식도 보지 않는 쓰레기가 된다. 어느 누구라도 줘야 나를 알리고 더 좋은 음식을 개발할 것 아닌가. 그래서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을 보냈다”며 “지금도 남이 레시피를 달라고 하면 무조건 준다”고 말했다.
이 명장이 조리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일식의 대가였던 고모부가 요리를 권하면서부터. 경제개발 시기였기에 취직이 쉬웠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1968년 코스모폴리탄호텔에서 첫걸음을 뗀 뒤 플라자·하얏트·힐튼 등 유명 호텔을 두루 거쳤다. 당시 호텔이 급증하고 인력난도 심해 진급도 빨라졌다. 하얏트에서는 입사 2년 만에 조리 과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기도 했다. 이후 스위스그랜드·리츠칼튼·JW메리어트 등 특급 호텔 주방들을 섭렵했다.
그의 조리 인생이 호텔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호텔을 나온 뒤에는 스카이온·마키노차야 등 뷔페 레스토랑에 관여했다. 이 명장은 “마키노차야는 당시 동양 최대 횟집이었던 ‘군산횟집’이 세운 것으로 당시 최인식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를 제의했다”며 “일주일에 이틀만 근무하고 월 500만 원을 받는 조건”이라고 회고했다. 충남에 있는 청운대로부터는 호텔조리식당경영학과 교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리사에서 교수로의 변신이었다. 대학을 정년퇴직한 후에는 반찬 가게인 마스터쿡에서 상무 직함을 가지고 샐러드·수프 등 메뉴 개발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그야말로 조리계의 ‘팔색조’다.
이 명장은 요리도 시대 흐름에 맞춰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고희(古稀)에 가까운 나이에도 쉬지 않고 메뉴 개발을 하는 이유다. 최근 부산 기장멸치축제에 가서는 멸치 하나만으로 40여 가지 요리를 내놓은 것이나, 얼마 전 백화점에서 생갈비를 선보인 것도 이러한 신념의 결과물이다.
새로운 계획도 가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잠시 보류하기는 했지만 프랑스식 요리도 계획 중이다. 그는 “딴 곳과는 다른 것, 고객들이 살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요리사가 할 일”이라며 “요즘에는 최근 흐름을 알기 위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고 다른 백화점은 어떤 제품이 나오나 조사를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야 자기 홍보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갈 수도 있다는 게 이 명장의 생각이다.
요리사를 원하는 후배들에게는 우선 음식에 정성을 담을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요리에 대해서는 자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차라리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청결’이 절대적이라는 게 이 명장의 철칙이다. 그는 “요리는 누군가가 먹는 음식을 만드는 행위다. 만약 먹고 배탈이라도 난다면 모든 게 ‘끝’”이라며 “식재료를 던지거나 방치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조리 분야 종사자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부하 직원들을 아끼라”는 답이 돌아왔다. “레시피가 밖으로 새나간다고 직원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필요하다면 호텔 주방을 후배에게 넘기고 떠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키울 줄 알아야 진정한 요리의 길을 걷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