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을 사방에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벌써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만약 폭발한다면 체르노빌보다 10배는 (피해가) 더 클 것입니다.”
4일(현지 시간)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이같이 밝히며 “즉시 발포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9일째에 접어든 러시아군이 유럽 최대 원전인 자포리자 원전까지 공격해 원전 단지 인근 훈련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즉시 텔레그램을 통해 자포리자 원전의 실시간 폐쇄회로(CC)TV 영상를 공개하고 화재 소식을 알렸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원전이 불타고 있다”며 “만약 폭발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물론 유럽 모두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화재는 소방 당국 투입 1시간 만에 진압돼 최악의 사태를 면했지만 자포리자 원전은 결국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 같은 소식에 이날 코스피와 닛케이지수 등이 하락 마감한 데 이어 유로스톡스 50과 FTSE 100 등 유럽 증시가 -3%(한국 시각 오후 9시 기준) 이상 하락하며 전 세계 증시가 요동쳤다.
러시아의 원전 공격 소식에 세계는 경악했다.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성명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로를 포함한 핵 시설에서 본격적인 군사작전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비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무모한 행동이 이제 유럽 전체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984~1995년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주 에네르호다르시에 건설된 자포리자 원전은 유럽 최대, 전 세계로는 9번째로 큰 원전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5기 중 6기를 자포리자 원전이 보유하고 있다. 각 원자로의 전출력은 950㎿로 총전출력이 5700㎿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다. 외신들은 자포리자 원전이 우크라이나 전력의 4분의 1가량을 공급하는 핵심 전략 자산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날 공격으로 가동되지 않는 자포리자 원자로 1호기 격실이 일부 훼손됐으나 안전에는 이상이 없다고 전했다. 전문가들도 일단 이번 화재가 과거 체르노빌 사태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포리자 원전은 가압경수로(PWR) 방식으로, 흑연감속로 방식을 적용했던 체르노빌과는 다른 방식을 적용해 폭발 위험이 낮기 때문이다. 호주국립대의 토니 어원 명예교수는 자포리자 원전 원자로의 노심이 녹거나 폭발 혹은 방사성물질 방출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며 “PWR형 원자로는 체르노빌의 원자로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말했다. IAEA도 “원전 주변 방사능 수치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러시아군은 자포리자 원전을 포함해 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돈바스의 도네츠크와 루한시크(루간시크)를 시작으로 헤르손을 사실상 점령했고 마리우폴까지 포위한 상태다. 세르히 오를로프 마리우폴 부시장은 CNN에 “우리는 러시아군에 포위됐다”며 26시간 동안 이어진 포격으로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망자가 몇 명인지 알지 못한다”며 “시체를 다 모을 수도 없고 셀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헤르손 인근에 위치한 항구도시 오데사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우려해 이미 항구를 폐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 해군 함정 몇 척이 크름반도(크림반도)를 떠나 오데사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전했다.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에 늘어선 64㎞ 길이의 러시아군 차량 행렬은 사흘째 진격을 하지 않고 멈춰 있다.
이처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장악에 집중하는 것은 크름반도부터 돈바스를 연결하기 위한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루한시크를 시작으로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네츠크와 마리우폴, 크름반도와 접한 헤르손·오데사를 모두 포획하면 러시아군은 작전 역량을 크게 높일 수 있다. CNN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의 러시아군 진격은 서쪽의 오데사부터 헤르손·마리우폴을 거쳐 동쪽의 분리주의 친러 지역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만들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