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소재 업체 스미토모화학이 한국에서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본격 양산한다. 2019년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이후 추진한 생산 현지화 전략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은 현지 수출 규제를 우회하며 최대 고객사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국내 생산·연구개발(R&D) 거점 확보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일본 현지 언론은 일본 수출 규제가 자국에 ‘역효과’를 불러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스미토모화학은 전북 익산에 위치한 자회사 동우화인켐에서 EUV 포토레지스트 출하를 시작했다. 스미토모화학은 지난달 중순 국내 EUV 포토레지스트 첫 생산을 기념하는 출하식을 열었다. 이 소재는 삼성전자에 공급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주요 반도체 소재 회사인 스미토모화학은 지난해 9월 100억 엔(약 954억 원)을 들여 한국에 첨단 포토레지스트 설비 증설에 나선다고 밝혔다. 당시 이 회사는 범용으로 쓰이는 불화아르곤(ArF), 불화크립톤(KrF)용 포토레지스트 생산 라인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발표 8개월 만에 첨단 기술에 쓰이는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 현지화에 성공한 것이다.
스미토모의 국내 첫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은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큰 의미가 있다. 소부장 공급망 해외 의존도가 점차 해소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를 만들 때 쓰는 핵심 소재다. 빛으로 회로 모양을 찍어내는 ‘노광’ 공정에 활용된다. 포토레지스트를 웨이퍼 위에 도포하면 EUV 빛이 닿은 부분이 반응하면서 회로 모양으로 변하는 원리다.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업체들이 세계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 내로라하는 반도체 제조사가 첨단 칩 생산을 위해 EUV 공정을 도입했지만 핵심 소재 생산은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모양새다.
일본 정부는 2019년 대법원의 강제 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트집 잡아 일본 업체들이 한국으로 EUV 포토레지스트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당시 세계 최초로 EUV 공정을 도입한 삼성전자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초유의 일본 수출 규제 사태를 겪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적극 추진했다. 일본 업체들은 세계 최대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측면 지원으로 매출을 확대하기 위해 생산·R&D 현지화를 결정했다.
스미토모화학 설비 투자 이전에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에서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은 물론 범용인 ArF·KrF 포토레지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에쓰화학은 TOK 송도 공장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타진하고 있다. 덩달아 미국 듀폰까지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 인프라 구축에 뛰어들고 삼성전자와 공급 여부를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재 업체 외에도 일본 장비 기업의 R&D 거점 투자 사례도 눈에 띈다.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업체 도쿄일렉트론(TEL)은 국내에 2000억 원을 투자해 R&D 센터 증축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맞춤형 반도체 장비를 보다 빠르게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업체들의 한국 거점 구축이 이어지면서 자국 정부를 향한 현지 언론들의 지적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 아사히 신문은 “일시적인 적대감에 사로잡힌 제재가 역효과를 초래했다”며 수출 규제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