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가 전기차를 선보인 지 얼마 안 된 시기. 한 운전자가 아침에 충전을 마치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양재동으로 향했다. 기온은 영하 7도. 너무 추워 난방을 켜는 순간 배터리 게이지가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볼 일을 마치고 경기도 화성으로 돌아가려니 자칫 차가 중간에 설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방법은 하나. 난방을 끈 채 운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두꺼운 외투를 입고 50분가량을 덜덜 떨며 돌아왔다.
‘히트 펌프 시스템’으로 특허청이 선정한 ‘올해의 특허왕’ 자리에 오른 김재연(51) 현대차 남양연구소 연구위원은 7일 양재동 본사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이때부터 배터리 걱정 없이, 냉난방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전기차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개발 배경을 설명했다.
남양연구소에서 열에너지시스템리서치랩장을 맡고 있는 김 연구위원은 열 시스템 분야에서 자타 공인 국내 최고의 연구자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신기술로 인정받은 기술 6개를 포함해 대내외에서 받은 상만 40여 개에 달한다. 장영실상도 두 번이나 받았고 특허도 230개나 보유하고 있다. 한 번 특허를 낼 때 보통 4개국에 동시 출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800건에 달하는 특허를 갖고 있는 셈이다.
김 연구위원의 이 같은 성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기술 개발에 나서기 전 약 2년간 사전 조사를 한다. 근무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업무를 마친 후 과외 시간에 이뤄진다. 심지어 휴가를 갈 때도 이틀은 연구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한다. 가족들에게는 나쁜 남편, 나쁜 아빠일 수밖에 없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기술이 어느 정도 알려진 후 연구 개발에 나서면 이미 낡은 기술이 돼 버립니다. 신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미리 선행 연구를 해야 합니다. 밤 10시까지 연구하는 이유죠.”
김 연구위원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지쳤을 때 한 걸음 더.’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기술 개발이 벽에 부딪힐 때다. 이론부터 효과, 평가, 데이터 평가까지 모든 것에서 동료들과 의견 충돌을 빚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거의 매번 일어난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단번에 모두를 설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너덧 번은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며 “최상의 기술을 만들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는 것은 필연”이라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마지막 한 삽을 더 뜰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위원이 한국 최고의 발명가가 된 데는 이러한 열정과 긍정의 힘 외에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 발명은 결코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나를 믿어주고 도움을 준 동료들과 협력사들이 없었다면 이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열정과 긍정, 배려야말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발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자신이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연구위원은 “자동차에 적용되는 기술은 모두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 없다는 것은 해결해야 할 모순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새로운 가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정의하고 그것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세계적으로 최고의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인물에게 부여하는 ‘트리즈 마스터’ 반열에 오른 이유도 이러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트리즈 마스터는 전 세계에 108명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김 연구위원은 107번째로 선정됐다.
김 연구위원이 자신의 발명품 중 가장 애착을 갖는 것으로 ‘복합식 콘덴서 에어컨 시스템’을 꼽았다. 자동차에서 에어컨을 강하게 틀면 연비가 낮아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연비를 높이겠다고 여름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에어컨 콘덴서를 공기로 냉각하는 공랭식에 냉각수로 냉각하는 수랭식을 추가해 최적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랭식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중간에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며 “이렇게 꼬박 5년을 매달린 끝에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