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여행] 꿈결 같은 江山 따라…다산의 숨결을 만나다

13개 코스 달하는 남양주 '다산길'

운길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수종사

두물머리 장관도 시원스레 펼쳐져

정약용 즐겨찾아 호연지기 기른 곳

다산 말년에 기거했던 '여유당' 복원

생가 옆엔 당대 실학파 저서 등 전시

실사구시 발자취, 오늘날도 큰 울림

경기도 남양주시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절에서 가장 높은 산신각 앞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굽어보고 있다. 장마철 물안개로 시야가 다소 흐린 것이 아쉽다. 사진=최수문 기자경기도 남양주시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절에서 가장 높은 산신각 앞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굽어보고 있다. 장마철 물안개로 시야가 다소 흐린 것이 아쉽다. 사진=최수문 기자




경기도 팔당댐과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를 거쳐 북한강 변을 따라 4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중앙선 운길산역을 지나서 길가 바로 왼쪽에 ‘운길산 수종사’라는 높이 5m가량의 석비가 나온다. 수종사를 안내하는 표지석이다.



수종사에 가기 위해서는 도로에서 벗어나 꼬불꼬불한 운길산 산길을 2㎞가량 올라가야 한다. 절은 해발 610m 운길산의 거의 정상 부근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한참 걸린다. 이런 험한 곳에 있는 절을 찾아간 것은 수종사에서 보이는 ‘두물머리(양수리)’ 경치 때문이다.

지난 주말 ‘등반’은 과히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최근 장마에 따른 짙은 물안개로 인해 두물머리 모습이 선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절을 찾는 사람들은 많다. 오히려 수종사를 휘감아 도는 산안개가 장관이다.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진 곳을 말하는 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조안리, 그리고 양평군 양수리로 둘러싸여 있다.

일부러 수종사에까지 간 것은 조선 말기의 실학 거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젊었을 때 이 절에 자주 올라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살았던 마을은 수종사에서 바로 아래에 보인다. 정약용은 수종사에서 과거 공부도 했다고 한다. 정치와 경제·사회의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실사구시와 실학 사상을 외쳤던 다산 선생을 다시 생각해 본다.

사진=최수문 기자사진=최수문 기자


행정구역상으로 조안면 송촌리에 속하는 수종사는 별로 크지 않은 절이다. 일설에 따르면 신라 때 지었다고 하지만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고려시대 때부터는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조선시대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부도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가 발원해 조성한 불상·보살상도 있다. 정약용이 ‘유수종사기(遊水鐘寺記)’를 지었다고 하니 명성은 알 만하다. 정약용은 이 글에서 “수종사에는 샘이 있는데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고 절 이름의 연원을 풀이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조안리와 양수리 사이에서 합쳐져 한강을 이루고 내려가면서 능내리에서 크게 ‘U’자 모양을 그린다. 능내리 강변에 다산생태공원이 조성돼 있고 인근에 정약용 생가와 무덤을 포함한 다산유적지가 있다.

다산유적지에 정약용 생가(여유당)이 복원돼 있다. 정약용 무덤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사진=최수문 기자다산유적지에 정약용 생가(여유당)이 복원돼 있다. 정약용 무덤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사진=최수문 기자



다산유적지는 수종사에서 남쪽으로 8㎞가량 거리에 있다. 생가는 정약용 선생이 말년에 살았던 ‘여유당’을 복원해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전통 양반집 모양을 재현했는데 부엌이라든지 외양간 등이 쏠쏠한 재미를 준다. 근근히 남아 있던 생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완전히 휩쓸려 갔다고 한다. 근처에는 여유당터에서 발견된 디딜방아를 갖다 놓았다. 즉 200년가량 된 유물인 셈인데 모서리가 꽤 깨어진 모습이 그동안의 풍파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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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적지 방문자들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은 정약용의 무덤이다. 무덤은 여유당 뒤편 언덕에 남향으로 조성돼 있다. 방문자 중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이 많은데 이심전심 공부를 잘하라는 뜻인 듯하다. 정약용은 오늘날의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고 관직 생활과 함께 오랜 귀양살이를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여유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여유당이라는 이름은 그의 서재에 붙인 이름으로, 그의 문집 이름도 여유당집이다. 다산유적지에는 이외에 정약용의 사당인 문도사도 있다.

박지원·이익·홍대용·김정희·박규수 등 18~19세기 실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이 쓴 책, 만든 기계 등이 흥미롭게 전시돼 있는 실학박물관. 사진=최수문 기자박지원·이익·홍대용·김정희·박규수 등 18~19세기 실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이 쓴 책, 만든 기계 등이 흥미롭게 전시돼 있는 실학박물관. 사진=최수문 기자


정약용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말기 국운이 쇠퇴할 때였다. 국왕 정조의 개혁 정치도 실패하고 정약용 자신도 모함 등으로 귀양살이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실사구시’를 기반으로 기존의 성리학 위주 정치와 사회제도에 대한 포괄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500여 권의 저서로 남았다.

정약용은 당시 전반적인 실학파들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 실학파의 사상과 유물을 모은 것이 다산유적지 바로 앞에 있는 실학박물관이다. 정약용 생가가 있기 때문에 이 박물관이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실학박물관에는 우리가 아는 박지원·이익·홍대용·김정희·박규수 등 18~19세기 실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이 쓴 책, 만든 기계 등이 흥미롭게 전시돼 있다.

실사구시를 표방한 학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으로 성리학이 대체재가 됐는데 당시에도 이는 ‘실학’ 역할을 했다. 다시 성리학이 자정 능력을 잃으면서 18세기 새로운 학문이 나왔고 이는 현재 우리가 부르는 고유명사로서의 실학이다. 물론 이런 실학이 당시 사회제도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까지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실패로 조선은 망국이 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실사구시의 학문과 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아닌가 한다. 현재 남양주시는 팔당호를 중심으로 ‘다산길 걷기여행길’을 조성해놓았다. 능내리의 연꽃체험마을·실학박물관·다산유적지를 거치는 제2코스를 핵심으로 모두 13개 코스의 ‘다산길’이 조성돼 있다.

글·사진(남양주)=최수문 기자 chsm@sedaily.com


최수문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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