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는 추리 소설을 좋아해요. 어릴적 셜록 홈즈 시리즈의 아서 코난 도일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애거서 크리스티부터 시작해서 마이클 코넬리(보슈 형사), 조르주 심농(매그레 반장), 마이 셰발&페르 발뢰(마르틴 베크), 마쓰모토 세이초 등등. 분위기가 어두워도 좋고, 경쾌해도 좋고, 결말이 사이다든 씁쓸하든 다 좋아하는 편.
지구용이 뜬금없이 왜 추리 소설 얘길 하냐구요? 탐정 소설 신간이 나왔는데 독특하게도 기후 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사실 에디터조차도 환경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이라면 좀 노잼 아닐까 걱정이 드는데…책을 읽어보고 생각을 바꿨어요. (TMI : 안전가옥은 에디터가 믿고 보는 출판사. SF,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판타지 등등 장르소설 맛집)
?오지라퍼가 세상을 구한다
그래서 소개하게 된 윤이안 작가님의 소설 <온난한 날들>. 기후위기가 심해진 수십년 후의 근미래를 살아가는 카페 부점장 박화음과 탐정 이해준의 이야기에요.
화음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데, 바로…식물에 남은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아무 소리나 식물에 남는 건 아니고, 원한이나 사념 같은 강렬한 감정이 주변 식물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걸 무방비로 들어야 하는 화음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그래서 화음은 ‘남의 불행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지 말자’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오지라퍼인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 옳지 않다 싶으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거든요. 예전엔 오지라퍼는 좀 귀찮은 존재나 민폐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요즘엔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오지라퍼들이 있는 덕분에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지도 모른다고요. 지금 지구용 레터를 읽고 있는 용사님들처럼요.
그리고 탐정 해준은 조그만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곤 있지만 사실은 식물학·화분학을 전공한 법의생태학자예요. ‘법의생태학’이란 말이 낯설었는데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꽃가루를 분석해서 범행이 일어난 장소를 찾아내는 그런 학문이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이름이 해준이라니…’헤어질 결심’의 장해준이 생각나는 바람에 결국 소설을 읽는 내내 박해일 배우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됐는데 상당히 괜찮은 캐스팅이더라고요. ‘연애의 목적’처럼 요사스럽게 말 잘하는 역할 있잖아요(자꾸 사심 죄송).
티격태격 but 유능한 탐정 콤비
화음과 해준은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고, 총 네 건의 사건을 해결하게 돼요. 사이비 종교의 기도원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되는 태국인 아내와 아이를 찾고, 고양이 유골함을 찾다가 더 큰 사건에 휘말리고, 피부병에 걸린 사람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고, 나중에는 폭탄 테러범을 추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기후위기 소설에 걸맞은 설정들이 등장하는데 되게 현실적이에요. 가정마다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이 제한되고, 에어콘을 잠깐만 틀면 탄소배출감독관이 달려와서 준엄하게 꾸짖고, 탄소배출량이 많을수록 세금을 더 내야 하고…지구의 위기가 점점 눈으로 보이는 요즘(폭우 포함), 엄청 그럴듯하죠.
소설에서까지 이런 걸 읽어야 해? 싶을 수도 있지만 교과서 같은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야기에 착 달라붙어 있더라고요. 플라스틱과 탄소배출량을 신경쓰는 등장 인물들을 보면서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멋있는 탐정인데 담배꽁초를 길에 마구 던져버린다거나 하면 좀…짜게 식잖아요.
그리고 또 에디터만 그럴 수도 있지만 좋았던 부분은 두 주인공의 티키타카였어요. 티격태격하는 콤비란 클리셰는 언제나 재밌잖아요. 주인공들이 좋아서, 한 권으로 끝날 게 아니라 시리즈로 계속 이어달라고 작가님 계신 방향으로 외치고 싶어졌어요.
책을 덮은 지 하루가 지났는데 여운이 꽤 남았어요. 길을 걷다 화음이 나무에 귀를 갖다댄 모습을 보게 될 것 같고, 아무데서나 명함을 돌리는 해준도 저기 어디 있을 것 같고…(과몰입)
밖에 나가기가 두려운 여름철, 독서와 함께 무사히 더위도 비도 피하시길 바랄게요. 환경에 그닥 관심이 없는 주변 분들에게도 슬쩍 추천하기 좋은 책인 것 같아요. 무탈한 날들이 지나가길 바라며, 우리 조금만 더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