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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범가족 '박희순,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

'모범가족' 박희순 / 사진=넷플릭스 제공'모범가족' 박희순 / 사진=넷플릭스 제공




배우에게 나이 듦이란, 영역이 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캐릭터의 폭이 좁아지고, 장르도 한정된다. 어느덧 50대가 된 배우 박희순도 이를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내려놓으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덜어내다 보니 뜻하지 않은 전성기를 맞게 됐다. '마이 네임'부터 '모범가족'까지, 그가 보여준 연기에는 농후한 매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청자도 이에 화답하듯 '어른 섹시'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환호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모범가족'(극본 이재곤/연출 김진우)은 파산과 이혼 위기에 놓인 평범한 가장 동하(정우)가 우연히 죽은 자의 돈을 발견하고 범죄 조직과 처절하게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박희순은 극중 완벽한 모범 시민인 동하를 완전한 마약 배달원으로 이용하는 조직의 2인자 광철을 연기한다.

박희순은 지난해 10월 공개돼 큰 인기를 끈 '마이 네임'에서 조직 보스를 연기한데 이어 또다시 조직원 역할을 맡게 됐다. 당시 그는 '누아르의 끝판왕', '어른 섹시' 등의 별명을 얻으며 주목받은 바 있다. 연달아 비슷한 캐릭터로 관객을 만나는 건 배우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일. 일각에서 "이미지 소모가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박희순은 캐릭터가 겹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모범가족'을 선택한 이유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정말 솔직히 얘기하자면, '마이 네임'이 오픈된 이후였다면 '모범가족'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마이 네임'을 찍고 있는 와중에 '모범가족'을 제안받은 상황이었죠. 솔직히 어떤 작품이 잘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마이 네임'과 '모범가족' 모두 캐릭터가 좋았고, 작품도 좋았어요. 어떤 게 저랑 더 어울릴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이 나이에 배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인데, 캐릭터와 작품이 겹친다고 안하는 건 손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만약에 영화였으면 두 작품에 모두 피해를 끼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둘 다 OTT잖아요. OTT 작품이 워낙 홍 같이 많아서 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이 두 작품을 각각 다르게 봐 주시는 것 같아서 후회는 없어요. 그래도 이런 비슷한 역할은 당분간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웃음)

"처음에는 가족 이야긴 줄 알고 대본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의외로 점점 이야기가 커지면서 사건이 재밌어지더라고요. 돈 가방을 갖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수많은 작품에서 다뤘잖아요. 때문에 '모범가족'은 어떤 풍으로 갈지 궁금했죠. 무모하게 갈 것인지, 잔잔하지만 묵직하게 끌고 갈 것인지, 빠른 템포로 흥겹게 갈 것인지 말이에요. 우리 작품은 예술성과 오락성이 적절히 섞인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모범가족' 박희순 / 사진=넷플릭스'모범가족' 박희순 / 사진=넷플릭스


박희순이 비슷한 캐릭터에 대한 부담을 안고 갈 정도로 광철은 매력적인 캐릭터다. 조직의 2인자로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음속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있다. 동하에게 마약 운반을 시킨 것도, 그의 가족이 깨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희순은 이런 광철의 마음이 결핍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광철한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보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늘 가족을 동경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동경이 '나도 가족을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어서 유사 가족이라는 조직을 만든 거고요. 가족에 대한 동경이 남긴 광철 내면의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공허함을 잘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동하의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신이 많은데, 거기에서 더 강조해서 표현하려고 했어요."



광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에 대한 동경이 돋보였다가도, 그 마음이 뒤틀렸을 때 악해진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유사 가족, 즉 조직에 순응하면서 모든 것을 바친 시간에 비례해 배신감도 커진 것이다. 박희순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광철을 공백 없이 촘촘하게 만들었다.

"보통 누아르에서 조직원의 역할은 대부분 복수나 인간성 상실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런데 광철은 다르죠. 가족이라고 생각한 조직에게 배신 당했고, 그로 인해 악인으로 변모하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배신에 중점을 두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동하를 이용하고 그 가족들을 돈벌이에 쓰지만, 가족이 깨지는 건 보고 싶지 않은 광철의 마음도 연장선에 두고 볼 수 있죠. 어떻게 보면 동하 가족의 조력자처럼 보이기까지 해요. 동하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것 자체가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한 행위니까요. 그런 아이러니를 표현해야 되는데, 직접적인 대사 없이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었어요."



얼핏 '마이 네임'의 무진과 비슷해 보이지만, 광철은 고민하고 고뇌한다는 데서 차별점이 있다. 뜨거운 남자 무진은 감정의 폭이 굉장히 큰 편으로 가슴속에 숨겨둔 비밀이 많은 인물. 무진이 복수와 욕망에 집중했다면, 광철은 욕심이 없고 잔잔하다. 무진이 불이라면 광철은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광철은 힘을 아주 많이 빼야 하는 캐릭터라 어려웠어요.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힘을 빼는 게 가장 어렵거든요. 자칫 힘을 너무 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이게 힘을 뺀 건지 아닌 건지 선을 지키는 게 가장 힘들었죠. 그 선을 넘나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마이 네임'과 '모범가족'을 마친 박희순은 '어른 섹시' 이미지를 굳혔다. '마이 네임'이 포문을 열었다면, '모범가족'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박희순은 이런 열광적인 반응을 두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섹시라는 게 저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죠. 사실 지금도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상의 탈의를 했는데, 저보다 몸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훨씬 더 멋있는 분들이 많아요. 쑥스럽고 창피합니다. 그래도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해요. 이로 인해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고요. 그래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웃음)

박희순처럼 50대에 '어른 섹시'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전성기를 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모든 게 내려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자평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배우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걸 몸소 경험한 박희순은 속상함이 커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어 기제로 내려놓음을 선택했다고.

"덜어내고, 덜어내고, 덜어내다 보니 '마이 네임' 같은 작품이 왔죠. 때문에 나이 먹는 게 마냥 나쁘지는 않아요. 나이를 떠나서, 지금 좋은 배우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 속에서 저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니 행복해요. 또 안을 들여다보면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치열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맞는지, 틀린지 스스로 물으면서 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현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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