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권 시대에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당초 공언했던 주요 5개국(G5) 과학기술 강국의 꿈을 만들기 위한 청사진과 전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과학기술계에서 나온다.
우선 2일 국회에 제출된 내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안이 30조 6574억 원으로 올해(29조 7770억 원)보다 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 중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장하는 R&D 예산은 9조 7500억 원으로 3.6% 늘었다. 과기정통부는 R&D 역점 방향과 관련해 반도체·이차전지·차세대원전 등 초격차 전략기술(1조 1000억 원)과 우주항공·양자·첨단바이오·인공지능(AI)·로봇 등 미래 선도 기술(2조 4000억 원)에 투자하기로 했다. 디지털 기술 개발과 산업·공공 분야 접목 등 디지털 전환(2조 5000억 원), 청정에너지, 저탄소 생태계, 자원 순환 등 탄소 중립(2조 3000억 원)에도 무게를 두기로 했다. 국가전략기술과 탄소 중립 등 인력 양성(5800억 원)에도 신경 쓰기로 했다.
하지만 내년 총예산(639조 원) 증가율이 올해 본예산(607조 7000억 원)보다 5.2% 늘어나는 것에 비해 R&D 예산 증가율은 턱없이 낮다. 문재인 정부에서 R&D 예산이 2019년 4.4%, 2020년 18%, 지난해 13.1%, 올해 8.8% 증가한 것과도 대비된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수출 비중이 20%나 되는 반도체를 대체할 신성장 동력을 빨리 확보해야 하지만 아직 대비를 못하고 있다”며 “과학기술계가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혁신 기술을 개발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의 연구 자금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R&D 예산이 홀대받은 데는 과학기술부총리 등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영향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기부총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공약했었다. 현 정부에서는 대통령실에서 과학기술보좌관이 폐지되고 과학교육특보가 신설됐으나 김창경 전 교육과학기술부 차관(한양대 교수)이 잠깐 특보를 하다가 현재는 공석인 상태다. 경제수석실에 과학기술비서관이 있으나 과학기술계를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사령탑 구축도 늦어져 정권 출범 110일쯤 지나서야 부의장(의장은 대통령)에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이 내정됐다.
무엇보다 과학기술계에서는 현 정부가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유롭고 유기적인 R&D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R&D를 통해 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 기업 간 기초연구부터 응용·개발 연구·사업화까지 유기적인 협력 문화를 구축하는 데 미흡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R&D 투자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코리아 R&D 패러독스’에서 벗어나려면 R&D 예산을 효과적으로 쓰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 대학에서는 여전히 정부 등의 연구비를 받아 논문 쓰고 마는 문화가 지배적이며 우수 인력도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국내 대학은 아직도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그것이 한계에 직면했지만 이를 뛰어넘을 정도의 새로운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의 변화가 너무 느리다”고 했다.
출연연도 정부 등의 연구 과제를 경쟁을 통해 수주해 인건비로 쓰는 PBS(Project Based System) 비중이 절반가량이나 돼 국가 임무형,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에 집중하기 힘든 구조다. 당장 정부의 공공기관 관리 체계 개편 방안에 맞춰 하반기에 경상비와 운영비 예산을 10% 이상 삭감하고 내년부터 인력을 감축해야 할 처지다. 출연연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산하 25개 출연연과 각 부처 직할 출연연이 있는데 정부 R&D 예산의 40%가량을 쓴다. 나머지는 대학과 기업이 지원받는다. 한 출연연 원장은 “가뜩이나 출연연에 대한 촘촘한 관리 체계로 인해 연구 우선순위 선정과 인력 채용·운용에서 재량권이 미흡한 실정”이라며 “독일 프라운호퍼연구소처럼 연구원에 R&D 투자의 자율성을 줘야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출연연 원장도 “출연연 등 공공 연구원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면 지금보다 절반 이상 임팩트 있는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출연연의 우수 인력이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에서 ‘블라인드 채용’ 같은 현장에 맞지 않는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한 출연연 박사는 “전 정부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강조하다가 현 정부는 인력 감축을 요구한다”며 “연구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는데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박희재 서울대 기계공학과 석학교수는 “지금처럼 정부가 R&D 연구비를 나눠주는 구조에서는 그 돈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며 “기초연구부터 상업화까지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학과 출연연이 기업과 협력하는 플랫폼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