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정치가 바로 서 있었더라면

문성진 논설위원

원화 폭락 위험한데 여야 정쟁 극심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정치싸움만

국가 실패 원인은 투자·혁신 막는 것

여야, 노동·교육·연금 개혁 실행해야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열린 첫 정기국회의 대정부 질문은 초지일관 난장판이었다. 19일 정치 분야의 대정부 질문 첫 타자로 나선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된 후 국민들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고 쏘아붙였고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당이 만들어 놓은 비정상 대한민국을 정상 국가로 바르게 세워내는 일이 윤석열 정부에 국민이 걸고 있는 기대”라고 응수했다. 당면한 경제 복합 위기를 이겨낼 대안이 논의됐어야 할 21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도 여야의 거친 설전만 오갔다.

이런 식의 여야 격돌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가 낸 예산안을 보면 초부자 감세를 13조 원 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반드시 이번 정기국회에서 막는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윤 대통령은 15일 출근길에 문재인 정부 시절의 태양광 비리에 대해 “국민들의 혈세가 어려운 분들을 위한 복지, 또 그분들을 지원하는 데 쓰여야 하는데 이런 이권 카르텔의 비리에 사용됐다”고 맹공했다.



경제를 내팽개친 정쟁은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반도체특별법’이 여야 이견으로 한 달 반 넘도록 통과조차 불투명한 것이 단적인 예다. 미국 의회는 여야 갈등 속에서도 자국 산업을 지킨다는 대의 아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2주일 만에 신속 처리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로 SMIC의 7나노급 개발을 이끌었고 대만은 범국가적 지원책을 통해 매출액이 10억 달러 넘는 반도체 대기업을 28개나 탄생시켰다. 정쟁의 늪에 빠진 한국만 총성 없는 글로벌 경제 전쟁에서 패잔병으로 남게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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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가 아니다. 라구람 라잔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통해 전 세계적인 달러 강세 현상이 지금은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이머징마켓과 개발도상국에서 ‘일련의 금융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선진국과 신흥국의 경계에 있는 한국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달 한국 원화는 주요 43개국 중 40개국 통화보다 값이 더 내려갔을 정도로 가치 하락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원화 값 폭락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통제를 받게 된 1997년을 돌아봐야 한다. 그때도 정치는 원화 환율 폭등은 나 몰라라 하고 싸움질만 했다. 그 바람에 위기 극복에 꼭 필요했던 금융 개혁안은 좌초했고 IMF 측과 협상을 벌이는 와중에 경제팀을 교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 중앙은행이 한국에 대한 외화 지원을 거부한 것 또한 못난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동명의 책에서 정치가 경제제도를 결정하고 국가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국가가 실패하는 원인은 착취적 경제제도가 국민이 저축이나 투자·혁신을 하겠다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경제가 경직된 노동·교육·연금 시스템 탓에 기업의 투자·혁신이 막히고 재정 건전성이 악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정치가 할 일이 아주 많다. 그런데도 169석의 거대 야당과 집권 여당이 싸움질이나 하면서 경제의 숨통을 막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의회 권력과 행정 권력의 타협 없는 투쟁을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1997년과 같은 실패를 다시 자초할 수도 있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는 ‘협력의 진화’라는 책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상대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이 더 나은 작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도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일갈했다. 상대가 갈등을 증폭시키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1997년의 정치가 공동체의 파국을 부른 것도 같은 이치다. 여야는 당면한 위기가 25년 전보다 녹록지 않음을 알고 반도체특별법 제정, 법인세 인하 등에 협력하고 노동·교육·연금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 다시는 ‘그때 정치가 바로 서 있었다면’이라는 미래 세대의 탄식을 듣게 되는 일이 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성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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