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으로 된 보험약관의 해석이 국문 번역본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원본인 영문을 따라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전 대법관)는 A자산운용사가 B손해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A자산운용사는2007년 우즈베키스탄 부동산 개발사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발행해 투자자들로부터 받은 금액 120억원을 시행사에게 빌려줬다가 개발사업이 무산되면서 손실을 봤다. 투자자들은 A자산운용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A자산운용사는 최종 패소해 12억8000여만원을 물어냈다.
A자산운용사는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한 B손해보험사에 소송방어비용과 판결금 일부를 청구했으나 B손해보험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담보제공 없이 펀드를 운영하다가 투자자에게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보험약관상 면책사유에 해당하는 고의적 법령 위반 행위로 보험금 지급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A자산운용은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이 사건 보험계약 약관의 면책조항인 '부정직행위(dishonesty)' 중 'any wilful violation or breach of any law' 조항을 재판부가 어떻게 판단할지였다. 보험계약서는 영문본과 번역본이 각각 작성됐는데, 영문으로 작성된 보험약관에는 '피보험자에 의한 의도적 사기행위 또는 의무해태 또는 '고의적(wilful)' 법령 위반으로 배상이 청구된 경우 손해를 배상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1,2심은 영문 보험약관 문구 중 'wilful'을 '고의적·계획적'인 행위로 한정해 해석해야 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wilful'의 의미를 일반적 고의가 아닌 계획적인 고의로 한정해야 할 합리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심은 이 사건 면책사유에 있는 ‘wilful’의 의미가 오로지 계획적인 고의에 한정된다고 전제하고, 원고의 행위가 그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판단만을 했을 뿐"이라며 "원고의 행위가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법령위반에 해당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심리를 진행하지 않은 채 피고가 면책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고 했다.
대법원은 이어 "원심은 위 원문을 ‘법원의 고의의 기망행위 또는 법령위반행위에 대한 확정판결이 없이 면책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역한 번역본을 그 판단 근거 중 하나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올바른 원문을 근거로 삼아야 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