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학동에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 앞. 소녀상을 지지하는 단체와 반대하는 세력이 내건 현수막과 피켓을 다소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20대 청년들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는 존재, 양국 국적자를 부모로 둔 ‘한일대표자들’의 공동대표 김연경(25)·박영미(24) 씨다.
14일 서울경제가 만난 김 대표와 박 대표는 모두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이 땅의 ‘중간자’들이다. 이중 김 대표의 어머니는 아예 자녀를 한국인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일본 국적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이들처럼 부모가 한국과 일본인인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한일 평화의 징검다리를 자처하며 만든 비정부조직(NGO)이 ‘한일국적자들’이다.
김 대표와 박 대표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도 ‘우리 나라’ 라고 부른다. 이들 몸 속에는 한일 양 국민의 피가 함께 흐른다. 박 대표는 두 나라 국적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한국만 조국이 아닙니다. 일본도 가족이고 내 나라입니다. 우리 몸 속에 흐르는 피에는 이미 한일 양국이 화합하고 있습니다.”
중간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사회의 시선이다.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한일 관계가 급랭 했을 때는 친구들로부터 ‘일본으로 꺼져라’ ‘쪽바리’ 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역사 수업 때 선생님이 일본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향해 “너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김 대표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일제 시대 때 일어난 사건 등을 듣다 보면 죄책감이 든다”며 “그럴 때는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 사는 한일국적자들이 어떤 일을 겪는 지 잘 알고 있기에 일본인 부모들은 ‘미안하다’는 입에 달고 산다. 김 대표의 어머니는 사극을 너무 좋아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다룬 방송이 나오면 아예 고개를 돌린다고 했다. 한국에 시집온 지 27년이나 됐고 한식을 너무 좋아해 자격증을 따는 등 이제는 한국인이나 다름 없지만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김 대표는 “어머니가 사극에서 일본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항상 “한국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한다”며 “그럴 때는 말 없이 안아주거나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한일국적자들은 양국이 갈등의 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젓가락을 놓을 대 일본은 가로로 놓지만 한국은 세로로 놓는 것처럼 서로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한다면 오히려 오해가 쌓일 수 있다. 직접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박 대표는 “분기별로 워크숍을 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토픽이 어떻게 하면 양국이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며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일 관계도 개선될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2019년에는 당시 일본 대사관 앞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서 프리허그를 진행했다. 한국과 일본을 같이 이해하고 보다 나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이벤트였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자신을 안아주는 따스한 체온과 말 한마디에 아직 한일 관계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박 대표는 “당시 노 재팬 운동에 동참했던 분이 우리를 안아주며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며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들 모두 양국의 평화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최근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머릿속은 착잡하기만 하다.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일 관계에 이념까지 가세하면서 관계 개선이 더 요원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들이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은 친일인지 반일인지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강요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주장을 하는 것도,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민간 차원에서 양국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려는 것 뿐입니다. 제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