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가 쏘아 올린 ‘돈맥경화’ 사태를 파고들어 가면 한국전력공사채가 나온다.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최상위 신용등급(AAA급) 한전채의 무더기 발행으로 채권 금리가 뛰고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를 몰아내는 구축 현상으로 기업의 돈 가뭄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올해 최대 40조 원 적자가 예상되지만 전기료 인상을 내놓고 할 수 없는 한전 입장에서는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생명줄과도 같다.
문제는 이마저도 올해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실적이 반영되면 내년에는 사채 발행 한도가 30조원 아래로 떨어져 사채 발행도 막히고 채무 불이행 위기에 몰린다. 한전으로서는 은행 대출, 전기 요금 인상 등 극히 제한된 선택지가 남아 있는데 카드마다 한계가 있어 해법 마련이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7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한전채는 올 들어 26일까지 23조 4900억 원어치가 발행됐다. 이는 지난해 전체 발행액(10조 3200억 원)의 두 배가 넘는다. 누적 발행액도 53조 9000억 원에 이른다. 올 상반기에만 14조 3000억 원 적자를 낸 한전이 밑 빠진 독을 한전채로 메우고 있다는 평가다.
갑갑한 대목은 실적 악화 등으로 한전의 사채 발행 한도가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 점이다. 올해 91조 8000억 원에 달했던 사채 발행 한도는 내년 29조 4000억 원(전망치)으로 축소된다. 한도의 기준이 되는 자본금과 적립금이 대폭 삭감되는 탓이다. 이미 누적 발행액이 사채 발행 한도를 넘겼기 때문에 결산이 끝나는 내년 4월부터는 사채 발행이 아예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야는 현재 자본금과 적립금 합의 2배인 사채 발행 한도를 5~8배로 완화하는 한전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한 상태다. 한전은 개정안 통과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자금 시장 경색으로 국회 통과가 어렵다는 관측이다. 이 때문에 회사채 시장을 교란시킨 주범인 한전을 살릴 대책 마련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첫 번째 방법은 내년 초 전기 요금 대폭 인상이다. 인상 폭은 최소 ㎾h당 50원이다. 통상 전기 요금이 ㎾h당 10원 오를 때마다 한전의 연 매출이 5조 원 증가하는 효과가 생긴다. 50원 인상으로 25조 원의 여유 자금이 한전에 공급되는 셈이다. 이 경우 한전의 적자를 최소화할 수 있는 데다 전기 요금 인상에 따른 전력 수요 효율화로 에너지 안보에 기여한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상률이 지나치게 가팔라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이미 한전은 올 들어 전기 요금을 근 20% 올렸다. 1·2차 오일 쇼크 당시인 1974년(85.1%), 1980년(35.9%), 1979년(34.6%)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인상률이다. 지난해 평균 판매 단가가 ㎾h당 108원 10전이었지만 4월 6원 90전, 7월 5원, 10월 7원 40전~16원 60전 인상해 지금은 ㎾h당 최소 127원 40전을 기록하고 있다. 내년 초 전기 요금을 ㎾h당 50원 올릴 경우 올해 말과 비교해 약 40%, 올해 초와 비교하면 자그마치 65%에 달하는 인상률이다. 전력 다소비 산업구조인 우리 기업들에 큰 부담이다.
둘째는 은행 대출 또는 기업어음(CP)·신종자본증권(영구채) 발행이다. 이날 금융 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채권 발행 대신 은행 대출을 통해 운영 자금을 마련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은행의 예금 잔액에 대한 대출금 잔액 비율인 예대율 규제도 6개월간 은행 105%, 저축은행 110%로 완화해줄 계획이다. 올해 한전의 은행 대출액은 아직 1조 원이 되지 않는 데다 은행 대출은 회사채 한도에도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대책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은행 대출이 회사채와 무엇이 다르냐는 근본적인 지적과 함께 은행 역시 대출 여력이 크지 않다. 최근 회사채 시장이 막혀 은행 대출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이 늘면서 6월 말 은행권 기업 여신 잔액은 1557조 4000억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12조 원 가까이 증가했다. 영구채나 CP 발행도 마찬가지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영구채의 경우 이자율을 최소 100bp(1bp=0.01%포인트)는 더 높게 책정해야 하는데 50년간 7%의 금리를 한전과 국민들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CP 역시 1년 미만으로 찍으려면 엄청난 양을 발행해야 하는데 회사채 발행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셋째는 정부의 한전 직접 지원이다. 정부는 앞서 2008년 한전이 2조 7980억 원의 영업손실을 내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6680억 원을 지원한 바 있다.
다만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올해 2차 추경을 포함한 총지출보다 40조가량 줄인 639조 원으로 편성하는 등 긴축 기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한전에 대한 혈세 지원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더구나 공기업에 대한 개혁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터라 직접 지원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에너지난 속에 에너지 보조금을 뿌리다 결국 실각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사례도 현 정부로서는 꺼림직하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여당에서 트러스 전 총리 사례를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으로 안다”며 “트러스가 전기 요금 대폭 인상→에너지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 등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선택지를 미리 해본 셈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전기 요금 인상도, 정부의 지원도 불발될 경우 한전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물가안정법과 전기사업법에 따르면 전기 요금 결정 과정에서 총괄원가제가 명시돼 있는데 정부의 인위적인 요금 인상 억제가 이 법안을 위배한다는 이유에서다. 유사 사례도 있다. 프랑스 정부가 지분 84%를 보유한 프랑스전력공사(EDF)는 8월 프랑스 최고행정법원에 전기료상한제로 발생한 손실 11조 원을 보상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다만 한전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만큼 실제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한전법 개정으로 한전채를 더 발행하면서 전기 요금 대폭 인상과 재정 지원이 동시에 이뤄지는 연착륙이 그나마 제일 나은 방향”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