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서울 중심의 골목에서 어린 청춘들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일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업무 관련 e메일까지도 애도의 글로 채워졌다. 꼭 가보려고 했던 전시회나 모임 등 모두 줄지어 취소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온전히 사라졌다. ‘집단적 트라우마’란 이런 소소한 변화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깊은 무기력과 우울로 찾아오기도 하고 혹은 그보다 작은 변화로 사회적 아픔이 드러나기도 한다. 양상은 달라도 슬픔을 처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같다.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지만 거창한 장례 절차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애도의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예술과 함께 애도하는 방법, 치유적 예술 감상 방법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치유적 예술’이란 사람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를 해주는 방식의 작품 감상 방법이다. 용어로 명명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일반적인 작품 감상과 다르지 않다. 필자는 독자에게 주변에 조용한 미술관을 찾아가서 작품을 감상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애도하는 방법으로 미술관을 찾아가 보자. 어떤 미술관이라도 괜찮다. 어떤 작품이라도 좋다.
미술은 원래 애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시작됐기에 그 안에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평론가 박영택은 저서 ‘애도하는 미술’에서 죽음은 오랫동안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으며 예술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추모의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예술 속 ‘죽음’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사라져가는 생명을 벽에 그려 기록하거나 16·17세기 서양의 정물화(바니타스화)는 상실과 소멸의 필연성을 상징하는 ‘해골’이나 ‘죽은 동물’을 주로 그렸으며 ‘모래시계·연기·과일’ 등으로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현대미술 작가 중에서 키키 스미스는 연이어 아버지와 여동생을 여의고 친구 여럿을 에이즈로 떠나보내며 ‘죽음’에 관한 주제를 줄곧 다뤄왔다. 죽음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인체·자연·동물 등 소멸되는 존재, 즉 생명이 소실돼 사라지는 것을 무채색으로 회화·판화·조각 등 다양하게 표현했다. ‘죽음’이란 테마를 일관되게 다룬 작품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구체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아닌 추상적인 작품을 선택해서 감상하는 것도 치유적 경험의 일환이다. 단색화 계열의 작품은 명상과 사유를 촉진해서 내면적 자아를 찾아 슬픔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키키 스미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마주했던 기억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자기만의 위로와 안녕을 찾았다고 한다. 예술 작품에는 이렇듯 죽음의 무게와 그를 지탱할 수 있는 위로의 힘이 공존한다.
이 글은 자칫 치유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그림이나 감상하자는 사치스러운 제안쯤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장 오랫동안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는 미술관의 기능을 시민에게 공감과 위로를 제공하는 사회적 치유의 장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