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황제’였던 고종과 메이지(明治)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선 둘 다 1852년생 동갑내기이고 재위 기간은 고종이 44년(1863~1907)이고 메이지가 45년(1867~1912)으로 장기간 통치했다. 하지만 국정운영 능력은 그들 치하의 두 국가의 운명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끌었다.
우선 일본을 보자. 1873년 다수의 신하들이 정한론을 주장했음에도 당시 21세의 메이지는 이들 강경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메이지유신 5년차였기에 새 체제가 안착됐다고 볼 수 없었다. 전쟁을 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강경론에 현혹되기 쉬운 나이임에도 메이지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내치 위주를 부국강병을 추진하며 나중에 개인적으로 ‘메이지대제(大帝)’라는 호칭까지 얻는다.
반면 조선에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절대 다수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겁이 많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은 비선라인을 통해 외세인 청군을 끌어들인다. 이에 일본군도 출동하면서 결국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으로 비화한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42세, 정한론 파동 때의 메이지보다 두 배가 많았다. 임금이 이랬으니 아래의 신하들도 제대로 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고종은 내내 일제에 시달리다가 강제퇴위되는 신세가 된다.
신간 ‘한일 근대인물 기행’은 19세기 후반 근대화와 서양세력 침투라는 이중 파고에 맞선 한국과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을 다루고 있다. 일본인 21명, 한국인 16명, 기타 외국인 2명 등 총 39명이 대상이다. 독자들이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꾸며간다.
친일파인 이완용의 일생이 대표적이다. 이완용은 몰락양반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고위관료인 친적 집에 양자로 들어가고 과거에 급제한 후 미국 파견까지 다녀오며 승승장구한다. 고종의 신임으로 장관급으로 있던 시기에 을사늑약 과정에서 친일로 돌아서면서 더러운 이름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이토 가문 양자가 되고 이후 사무라이 신분을 얻으면서 출세를 한다. 이토도 서양을 다니면서 근대사상을 깨우쳤고 결국 청나라, 러시아 등을 꺾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완용은 이토의 수족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에서 앞잡이 노릇을 했다.
책에서는 조선에서 고종과 이완용 외에도 전봉준, 김홍집, 서재필, 최익현, 김옥균, 이동인 등이, 일본에서는 메이지·이토 외에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후쿠자와 유키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인물들의 생애가 펼쳐진다. 다만 책은 조선(대한제국)이 패망한 이유는 결국 조선 사람 때문이라는 인식으로 유도한다. 저자도 ‘조상 탓’을 하는 책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의 흑역사인 이 시기를 미화하려는 콤플렉스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역사적 사실대로 ‘그대로 보기’와 ‘제대로 보기’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는 것만이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보험”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금융기관 지점장과 중견그룹 계열사 대표를 역임하다가 현재 컨설팅회사 모젤스의 대표로 있는 박경민이다.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님에도 철저한 사료 분석을 통해 한일 근대사를 구성해냈다.
다만 역사적 사실은 꼭 한국에서 실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유신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신속한 진행과 함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으로 천황제에 기반한 ‘국가신도화’과 ‘제정일치’를 선언하고 이 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이런 유산은 패전 후에도 강고히 남아 현재도 여전히 일왕제도라는 왕조를 유지하는 바탕이 됐다.
반면 조선은 무능한 고종에 대한 반발 심리를 포함해 3·1운동 과정에서 공화제가 선언된다. ‘군주’라는 후진적인 유물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우리 헌법 11조는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며 왕이나 귀족, 양반 등 계급제도의 금지를 선언하고 있다.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