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켜든 머리는 꼿꼿하고, 올려 세운 옷깃은 당당하다. 색깔마저 귀족적인 보라색이다. 그 고고함은 처연함과 공존한다. 180×120㎝로 확대된 대형 사진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들러붙은 먼지, 뒤엉킨 안료의 흔적들은 ‘쇠락해버린 귀족의 딸’이 지키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상상하게 한다. 꽃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1940년작으로 전하는 ‘무희(캉캉)’ 속 주인공과도 닮았다. 남의 치맛속이 뭐 그리 궁금해 넋놓고 보냐며, 다리를 높이 차 들어 “볼테면 보라” 식으로 자신만만 춤추는 캉캉 무희를 무대 뒤에서 포착한 그림 말이다. 나약한 존재이나 자신감은 충만하다. 20년 전 말라죽은 꽃을 고운 색으로 화장(化粧)해 부활시킨 이는 사진작가 조선희(51). 그가 ‘꽃’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2020년 5월 촬영한 ‘#1’이다.
‘부활한 꽃’에 사람이 담겼다
‘연예인들의 셀럽’으로 통하는 조선희의 첫 순수예술 개인 사진전 ‘희(姬): 나의 우주다’가 용산구 한남동 뉴스프링프로젝트에서 지난달 20일부터 1월 5일까지 열렸다. 의뢰인의 커미션으로 작업한 그간의 활동을 굳이 상업예술로 분류한다면, 순수한 내적 동력에 의해 목적없이 작업했다는 점이 순수예술로 달리 부르게 하는 이유다. 화보 형식의 인물사진을 예술사진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조 작가는 그간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일민미술관, 대림미술관 등의 그룹전에 초대된 적 있으나 순수 사진만을 선보인 개인전은 처음이었다.
이번 전시에 맞춰 강남구 논현동 조아조아 스튜디오에서 만난 조 작가는 “선물 받은 꽃들인데, 누군가 나를 위해 건넨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있기에 시들어 죽었어도 버리고 싶지 않아 말려둔 채 10년 이상 20년 째 간직했다”면서 “어떻게 이 꽃들을 부활시킬까 생각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염(殮)하기 전 화장하는 것처럼 안료 가루를 뿌려 예쁘게 메이크업한 후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촬영했다”고 말했다.
되살아난 꽃에는 특별한 영혼이 깃들었다. 지난해 완성한 ‘#29’의 샛노란 꽃은 늙은 피에로를 닮았다. 남들을 웃기고 울리던 피에로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그의 고깔모자가 살짝 기울었고, 헐렁한 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다 멈춘 찰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파리 모두 떨구고 줄기 끝에 꽃송이 자리만 남긴 것들은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풍만한 아름다움을 세월에 모두 바치고 앙상한 뼈대에 가슴과 둔부의 흔적만을 남긴 여인처럼.
배치에 따라 꽃들은 무희로 변신해 한때 뜨거웠던 열정을 과시한다. 초록색 꽃 두 송이를 같은 곡률로 등 맞대게 한 ‘#11’은 발레의 2인무를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을 ‘파드되(pas de deux)’라 비유한다면 여러 송이의 꽃을 대칭되게 배치한 ‘#10’은 군무라 하겠다. 작가가 오랫동안 인물사진에 주력한 까닭인지 꽃에 사람이 투영된다. 이에 대해 조 작가는 “사람을 찍는 일과 꽃을 찍는 일에 분명 통하는 지점이 있다”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30년간 몸에 밴 ‘사람 보는 습관’이 꽃에도 담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 끝자인 계집 희(姬) 자를 쓴 전시제목 ‘희:나의 우주다’에 대해 “난 계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우주는 계집스럽다. 나의 꽃들은 계집처럼 춤추고 계집처럼 울고 계집처럼 웃는다. 계집의 마음을 버리지 못해 꽃들의 죽음을 바라보지 못했고 그들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그 속에서 같이 살아났다. 계집이 나의 우주다”라고 작가노트에 적었다.
‘죽음’을 긍정적 화두로 삼은 조선희
조선희 작가는 1996년 배우 이정재의 담배 피는 사진으로 일약 ‘메이저’ 사진작가로 부상했다. 커다란 천사의 날개를 단 ‘앤젤’ 시리즈의 장동건과 이병헌, 검은 눈물을 흘리는 장진영, 남장한 채 시가를 입에 문 송혜교 등 그의 특기는 예쁘게 찍는 사진이 아니라 인물의 새로운 면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진가를 계획한 적은 없었다. 연세대 의생활학과에 입학한 후 사진동아리에 들어간 게 평생의 업이 됐다. 대학생활 내내 공부보다 사진에 더 열심이었다. 비전공자라 사진계 진입이 쉽지 않았던 그를 1994년 작가 김중만이 제자로 받아들였고 본격 프로의 길로 들어섰다.
첫 포트폴리오의 주제가 ‘죽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존재이던 아버지를 열 네 살에 떠나보낸 경험이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이번 작업의 소재가 ‘죽은 꽃’인 것도 무관하지 않다.
“어릴 때,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인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유난히 많았어요. 내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나 보내는 게 아니라 내 방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말이에요. 바짝 말라버린 꽃 한 송이도 버릴 수 없던 마음처럼요.”
말린 꽃에 색을 입혀보기로 한 것에는 할머니의 죽음이 있다.
“20대 중반에는 나를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심장과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충격이 컸죠.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마지막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사진가의 윤리를 떠나 심리적 갈망이었죠. 어쩌면 미학적 갈구였을지도 모르지만…. 할머니 염 사진을 찍었다고 집에서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곱게 화장시킨 그 사진을 몇 년 전 우연찮게 다시 보니 여러 생각이 교차했어요. 꽃에다 염을 하게된 계기였어요.”
물감으로 색을 칠하면 마른 꽃을 쓰러뜨릴 게 분명했다. 섬세한 가루 안료를 뿌리기로 했고, 뭉치지 않고 고루 흡착되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카메라 앞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하는 형광안료를 사용했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 미라’가 완성됐다.
“색을 고르고, 채반에 걸러 얻은 고운 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질러가며 뿌려서 색을 입히는 과정은 제 작업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화가가 색을 골라 칠하듯, 안료를 입히는 과정에 몰입해 어느 방향에서 어떤 각도로 찍을지까지 자동으로(automatically) 결정됩니다.”
가루 안료 덕분에 ‘꽃’들은 사진이지만 손으로 만진 듯한 촉감을 느끼게 한다. 뉴스프링스프로젝트 전시장 안에는 작업에 사용된 꽃들이 투명 아크릴박스에 담겨 함께 선보였다.
출품작 32점은 일찌감치 ‘완판’됐다. 이번 ‘꽃’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라벤더색 바탕의 청보라색 꽃 ‘#31’은 작가의 오랜 지인이자 넷플릭스의 화제작 ‘더 글로리’의 주인공 송혜교 씨가 구입했다. 송혜교는 지난달 26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이번 전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로써 ‘꽃’ 작업은 마무리다. 다음 작업을 묻는 질문에 조 작가는 “낡은 인형과 죽은 새를 얼린 일명 ‘큐브’ 시리즈를 몇 년 전부터 준비해오고 있다”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