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이' 김현주 "실패해도 한참 뒤엔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배우 김현주는 변화하고 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멜로퀸’에서 장르물속 여성 서사를 쌓는 주역이 됐다. 나아가 액션 연기를 바탕으로 SF물 주인공까지 꿰찼다. 도전하고 이루고 성장하기를 반복하는 그는 현재진행형이다.

김현주가 타이틀롤을 맡은 넷플릭스 영화 ‘정이’(감독 연상호)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SF다. 데뷔 이래로 SF물이 처음인 그에게 ‘정이’는 과감한 도전이었다.

“혼자라면 할 수 없었어요. 믿어준 연 감독님이 있었고, 저도 감독님에게 신뢰감이 있었거든요. 현장에서는 부담을 느끼면서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재밌게 촬영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을 찍는 것도 생소하지만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기대감이 앞섰죠.”

참고 자료가 없는 로봇 연기는 장벽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분량을 정이의 뇌를 복제한 로봇으로 소화했다. 통상적인 로봇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 감정도 있다. 대신 기계의 전원 버튼처럼 연구원들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다가 멈추는 것을 반복한다.

“부자연스러운데 부자연스러워 보이면 안 된다는 게 첫 번째 숙제였어요. 멈춰지는 장면이 있고 깨어나는 장면이 힘들었죠. 감독님은 깊은 수면에 가라 앉아 있다가 깨어나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후반에는 계속 숨을 안 쉬고 있는 건 불가능하니까 현장에서는 멈춰있는 상태로 연기하고 CG의 도움도 있었어요.”



작품은 김현주의 액션이 돋보인다. 정이는 전설적인 용병답게 날렵하게 몸을 날리고 긴장감을 조성한다. 다만 멜로드라마를 주름잡았던 김현주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라면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런 의외성을 끌어낸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서 첫 호흡을 맞췄던 연 감독이다.

“제가 해오지 않았던 것에 도전하고 싶고, 한계점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나 왜 캐스팅 안 해주지’라면서 남들을 부러워하기만 했어요. 욕구보다 용기가 부족했었죠. 연 감독님이 ‘지옥’부터 제안을 주시면서 도전 정신을 일깨워 주셨어요.”

단지 ‘지옥’ 때 보여줬던 액션만으로 연 감독이 캐스팅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봇 정이는 감정선이 드러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섬세한 감정 연기가 필요했다. 과하지 않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정이와 서현 사이의) 모성애는 근본적인 것이라 연기하면서 차별화 두려고 하지 않았어요. 인간과 로봇이 외형적으로 전혀 구별이 안 될 때 인간이 갖고 있는 우월한 힘은 모성애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싶었고요. 그런 게 어떤 과학 기술로 표현하거나 모방할 수 없는 것이죠.”

작품은 넷플릭스 글로벌 1위에 오르며 호성적을 냈다. 한국형 SF를 전 세계에 선보인 좋은 기회다. 김현주 역시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결과를 받은 현재까지 이런 도전에 의의를 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SF물이 나온다고?’ 싶었어요. 성공 실패 여부를 떠나서 참여하고 싶다는 의욕이 앞섰죠. 잘 만들고 좋은 결과를 내는 건 두 번째 문제였어요. 희소성 있는 작품이라 신났고 재미있게 생각했어요.”

국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SF 보다 신파적 요소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김현주는 이를 두고 “굉장히 한국적”이라고 단언했다. 액션에만 집중한 시청자들은 실망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느 장르에서든 감성이 빠지면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런 (신파적인) 부분을 덜어냈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네가 내 딸이니’ ‘제가 서현이에요’라고 할 수도 있는데 줄였거든요. 결과적으로 노력했고 한국스럽게 나왔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런 장르를 시도해야 발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좋든 안 좋든 레퍼런스가 될 수 있고, 이걸 발판 삼아 좋은 기술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고요. 혹평들도 있지만 좋아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아주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공감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과정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김현주는 ‘지옥’ ‘정이’에 이어 ‘선산’으로 연 감독과 세 작품 째 함께한다. 이른 바 ‘연니버스(연상호 감독의 유니버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는 연 감독이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한 팬의 입장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연 감독님은 다양한 아이디어와 사상,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분명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강요하거나 표출하지 않죠.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해석하게끔 여지를 줘요. 본인이 생각하거나 표현하고 싶은 세계관이 명확하게 있다면 배우들도 표현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필모그래피가 쌓일수록 관심사의 변화도 보인다. 김현주는 지난 2019년 드라마 ‘왓쳐(WATCHER)’를 기점으로 ‘언더커버’ ‘트롤리’에 이르기까지 무게감 있는 장르물에 연이어 출연했다. 통통 튀고 발랄한 멜로 드라마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과거와 상반된다.

“주안점을 두는 건 없지만 관심사나 성향이 변하거나 심리 상태에 따라 꽂히는 게 다른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제가 잘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어떤 캐릭터를 보면 서사가 한 번에 그려지거든요. 그런 건 잘할 수 있겠다 싶어요. 장르가 바뀌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 보다, 이런 것도 대중이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류의 작품이 들어와서 선택하다 보니 똑같아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어떤 시점에서는 대중이 저를 이런 쪽으로 바라봐 주니까 이런 류의 작품만 들어왔고요. 변하고 싶은 욕구는 계속 있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왔어요.”

그는 우연찮게도 변화하는 시기에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더 나은 필모그래피를 쌓고 싶다는 욕심이 발화점이 됐다. 후회가 남지 않게 현재를 보내고 싶다.

“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사람이에요. 도전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염려나 불안감을 느끼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유연해졌어요. ‘왓쳐’와 ‘지옥’을 하면서 ‘해도 된다. 실패해도 되고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실패해도 한참 뒤에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