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에서도 한국 근대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지난주 LA 아트페어 위크 기간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이하 LACMA)에서 한국 근대 미술을 조명한 전시 ‘사이의 공간 (The Space Between): 한국미술의 근대 (The Modern in Korean Art)’가 막을 내렸다.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전시 출품작 130여 점 중 62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다른 20여 점은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었던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컬렉션들이었다. 다양한 인종의 관람객들은 처음 마주하는 한국 근대 미술품 앞에 오랜 시간 머물며 호기심 가득 찬 눈빛으로 작품들을 관람했다.
서구권에서는 전후(戰後) 한국 미술로 여겨지는 ‘단색화’ 중심의 편향적인 전시가 빈번했던 경향을 고려하면 이번 전시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동안 한국 미술은 포스트식민주의 아래 서구의 프레임에서 바라본 동양적 미술이 대부분 주목되어 왔던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에 비해 한국 근대 미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과 혼돈의 시기에 탄생해 한국의 중요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저평가돼 있다. 이 시기 한국의 예술가들은 불가피하게 일본에 의해 변형된 서구의 미술 교육을 받아들였다. 이는 예술가들이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며, 수묵화 중심의 기존 한국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미국 중심의 서구 미술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했고, 자연스럽게 전쟁 이후 미국 뉴욕이 예술의 중심지가 됐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유럽의 근대 미술을 재해석하는 움직임과 그린버그의 추상표현주의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한국 예술가들은 일제강점기 때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는 역동적인 근대 한국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 연대기 순으로 소개됐다. 조선시대 후기 황제의 초상을 담당했던 채용신의 ‘고종황제어진'부터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자화상'(1915),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 배운성의 ‘가족도'(1930~35), 백남순의 ‘낙원'(1936), 김환기의 ‘산월’(1958), 박수근의 ‘유동’(1964) 등 많은 걸작들이 전시됐다.
이 중 단연 주목을 끈 작품은 월북 화가 이쾌대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8~49)이다. 이 그림에는 혼돈의 근대 한국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자화상 속 이쾌대는 개량한복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서구 복식인 페도라와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여러 개의 붓들도 눈길을 끈다. 이쾌대는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 도입된 새로운 서양 미술 재료들을 상징하는 유화용, 수채화용 붓들을 수묵화의 상징인 먹물용 붓과 함께 들고 있다. 자화상 속 배경은 유럽의 인상파 회화를 연상시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가집과 더불어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짐을 이고 가는 모습들이 보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자화상'을 비롯해 해방 이후 여성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면서 출현한 ‘신여성’을 다룬 섹션도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신여성' 운동은 남성이 지배적이던 유교 기반의 사회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전시작들은 당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전시작 중 이유태의 ‘탐구'(1944)에는 실험실로 보이는 공간 안에 여성이 앉아 있다. 작품 속 소재이자 근대 문물의 상징인 각종 과학 실험 도구들과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은 역설적인 매력을 뽐낸다. 무엇보다도 그림 속 주인공인 여성은 한복 저고리 위에 연구용 가운을 입고 있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개선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드러낸다.
이는 현대 미술에서 지속적으로 여성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는 경향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서도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들은 백인 남성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왔다. 과거 한국의 ‘신여성' 운동이 일시적인 해프닝에 그쳤다면, 현재 미술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여성 작가들의 작업들과 더불어 현대 여성의 권리가 더 개선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전시는 단순히 한국 근대시기의 특정 작품들뿐만 아니라 더 포괄적인 담론들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더 다양한 한국 문화가 해외에서도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LA)=엄태근 아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