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업계가 미국·중국·대만 등 반도체 강국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은 정부 지원에 지정학적 리스크, 고급 인재 유치 난관까지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주요 국가들이 수백조 원에 달하는 반도체 투자 계획을 쏟아내면서 수년간 공급과잉 우려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미국과 중국 간 패권 전쟁으로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거대한 변곡점에 다다른 만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범국가 차원의 반도체 생태계 조성과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2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승자 독식 특성을 가진 산업”이라며 “국가가 의지를 갖고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비롯한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나서지 않으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결정한 대형 투자가 공급과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도 우려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반도체공학회 부회장)는 “미국과 유럽에서 반도체 공장이 짧은 시간 만에 급증했는데 문제는 팹이 늘어난 만큼의 반도체 수요 증가 요인이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AI)·전장 등 반도체 수요처가 다양해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늘어난 반도체 물량을 모두 감당할 만한 수요를 견인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구조적인 공급과잉이 고착화되면 메모리·시스템반도체 전반에 걸친 연쇄 치킨게임이 불가피하다. 세계 강대국이 반도체에 국가 명운이 달렸다고 보고 공격적인 지원을 이어가는 상황을 감안하면 치킨게임의 강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셀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인력’이라는 양축에서 단단한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재희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이 따라올 수 없는 반도체 기술 격차를 계속 유지해야 협상 테이블에 낄 수 있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지렛대가 부족한 한국의 경우 향후 펼쳐질 반도체 전쟁 속에서 초격차 기술을 협상 카드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에 비해 생태계가 빈약한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봤다. 최근 산업·안보 공급망의 핵심으로 떠오른 시스템반도체 분야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한국 업체들의 글로벌 점유율은 3%로 경쟁력이 턱없이 낮은 상황이다.
범 교수는 “설계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야 하고 시스템반도체 강자인 대만처럼 팹리스 기업과 파운드리 연계도 강화해야 한다”며 “이런 측면에서 반도체 공장 건설 세액공제를 두고 특혜를 준다는 식으로 몰고 가면 미래를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력은 양성책은 물론 유출 방지책까지 폭넓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수십 년간 반도체 제조에 손을 놓았던 미국이 향후 공격적인 반도체 인재 포섭에 나설 가능성이 커서다. 범 교수는 “미국 반도체 공장이 완공되고 국내 엔지니어들의 현지 근무가 늘어난다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수 인재 유출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5~10년 시간을 들여 찬찬히 인재 육성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인재들이 의대로 많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매우 우려된다. 우수 인력에 한해서는 인센티브 등을 통해 파격적인 처우를 해줘야 한다고 본다”며 “전반적으로는 계약학과 등을 비롯한 공격적인 인재 양성책을 지속하는 동시에 외국 우수 인력을 이민 정책 등을 통해 들여오는 ‘투트랙 전략’을 써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