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이 범죄자를 만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하게 태어나지만 환경에 의해 악인이 되는 거죠."
1994년 연쇄살인조직 ‘지존파’ 검거를 주도한 고병천(74)씨가 형사 생활 33년간 숱한 흉악범을 마주치며 되레 ‘성선설’을 믿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최근 수사록 '엄마 젖이 달았어요'를 출간했다.
4일 연합뉴스는 지존파 검거 당시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으로 일한 고씨를 만났다.
1976년 순경으로 임관해 2009년 은퇴한 고씨는 30년을 강력계 형사로 일했다. '살인 공장'을 만들어놓고 부유층을 겨냥한 엽기적 납치살인 행각을 벌인 지존파, 살인을 목적으로 택시를 몰고 다니며 여성 승객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온보현이 그의 손에 붙잡혔다.
수사록의 겉면으로 쓰기에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책 제목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겼다. 지존파 행동대장 김현양은 친모에게 수면제를 먹여 살해하려다 멈춘 이유를 묻자 "죽이기 전에 엄마 젖을 한번 먹고 싶어서 입에 물었는데 달았다. 그래서 못 죽였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은 "우리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부정 축재한 사람을 응징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제가 만난 흉악범들의 범행 동기는 잘 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었다"며 "'묻지마 범죄'를 요즘 이상동기 범죄라고 부르지만 저는 '빈곤동기 범죄'로 이름 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고씨는 지난 7월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 역시 가난에서 싹튼 열등감과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봤다.
"제가 만난 흉악범은 다 그랬어요. 돈이 없어 부모가 싸우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고…. 그들이 범죄자가 된 것은 제 책임일 수도 있죠. 기성세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으니까요."
책에는 범죄자의 아내와 아이를 위해 수원에서 부천까지 찾아가 과자와 편지를 문 앞에 걸어둔 일, 지존파 일당에게 회개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주반지를 하나씩 건넨 일화도 담겼다.
그는 "밥이라도 한 그릇 사줘서 보내고 묵주반지라도 주며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고씨는 불우한 환경이 범죄에 영향을 줬다 하더라도 범죄자를 옹호하거나 동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가난하다고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은 피해자보다 피의자 인권을 더 존중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의 인권을 박탈한 이들은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죠."
고씨는 그 죗값을 위해 사건 현장에서 보낸 30년 동안 집에 제대로 들어간 날을 합치면 10년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게 경찰이거든요. 그걸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해요. 더 많은 경찰이 길거리에 나와 있어야 합니다. 경찰관이 바빠야 국민이 안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