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가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 위탁을 맡긴 알코올중독 치료 전문 병원이 지난 6월 김해시 서부경찰서에서 압수수색을 받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 씨가 공동원장인 B 씨와 공모해 미다졸람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상습 투약한 혐의다. 미다졸람은 일명 우유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 케타민과 함께 3대 수면마취제로 불린다. 프로포폴에 비해 환각 효과가 약하고 호흡곤란 등 부작용 위험이 적지만 지속 시간이 길다는 차이가 있다.
A 씨가 2020년 6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미다졸람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총 83회에 걸쳐 처방받았다는 공익 제보가 국민권익위에 접수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을 거쳐 경찰청으로 수사 의뢰가 되기까지 약 6개월이 걸렸다. 병원 방문 이력이 없는 A 씨의 가족 3명 명의로도 총 367회에 걸쳐 향정약 처방전이 발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향정약 또는 마약류를 과다하게 처방받으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해 해당 병원 원장인 B 씨의 처방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B 씨는 A 씨에게 처방한 약물을 정맥 투여하지 않은 채 앰플째로 건넨 뒤 허위로 진료기록부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의료용 마약 접근 쉬운데…공익제보 후 9개월째 수사 진척 없어
현행 의료법상 마약류취급보고의무 위반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의사 면허 취소가 가능하다. 진료기록부를 허위 작성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받는 행위도 국민건강보험법 위반에 해당한다. 그러나 압수수색을 벌인 지 3개월째 수사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 경찰 관계자는 “올 3월 해당 병원 의사 2명이 입건돼 1명을 소환조사했고 나머지 1명도 조만간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현재로서는 진료 목적 외 허위진료기록부 작성 등의 혐의로 보고 있으나 필요 시 약물검사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A 씨는 마약류 남용 혐의로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지 2주 만에 김해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장 자격으로 김해시보건소 및 중독 재활 관련 유관기관들과 함께 마약류 중독 국제연합포럼을 열었다. 공모 혐의를 받는 B 씨 역시 김해중부경찰서의 의료자문위원, 창원지방법원의 의료전문 자문위원 등의 자격을 유지 중이다. 익명을 요한 제보자는 “A 씨가 처방받은 약은 한 번에 맞으면 빈사 상태에 이르는 수준이다. 의료인 상식으로는 처방하지 않는 용량”이라며 “지자체의 수탁을 받아 중독치료를 담당해온 기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음에도 수사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 마약류 셀프처방한 의사 한해 8000명…대리처방·명의 도용도 쉬워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천명했지만 일반인보다 마약류 의약품에 접근하기 쉬운 의료인들의 마약 범죄 관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현행법상 의사·치과의사·한의사·수의사 등 마약류 취급이 가능한 의료업자들은 진료기록부에 마약 또는 향정신성의약품 품명과 수량만 적으면 직접 투약이 가능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연숙 국민의힘 의원이 식약처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의사의 마약류 셀프 처방 의심 사례는 2018년 5월부터 2022년 6월까지 4년 1개월간 10만 5601건, 처방량은 355만 9513정에 달했다.
마약류 셀프 처방이 추정되는 의사는 △2018년(5~12월) 5681명 △2019년 8185명 △2020년 7879명 △2021년 7736명 △2022년(1~6월) 5698명으로 집계됐다. 어림잡아 매년 8000명의 의사가 마약류를 셀프 처방했다는 의미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의사 1명이 한 해 26회에 걸쳐 마약류 1만 9792정을 처방한 사례도 드러났다. 가족 등 타인 명의로 대리 처방하거나 다른 의사의 명의를 도용한 사례까지 합치면 의사들의 마약류 오남용 문제는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최 의원이 공개한 사례 중에는 2018년 12월부터 2020년 5월까지 할머니 명의로 진료기록을 허위로 작성하고 총 125회에 걸쳐 향정신성의약품인 스틸녹스정 2308정을 처방한 다음 본인이 투약한 사례가 있었다. 비슷한 기간 다른 의사의 아이디로 전자 진료기록부에 접속해 진료기록을 허위 작성하고 본인 앞으로 스틸녹스정을 59회에 걸쳐 1388정 처방 및 투약한 사실도 적발됐지만 1개월 15일의 자격정지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마약류 관련 범죄를 저지른 의사들이 버젓이 진료 행위를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면허취소 절차가 허술한 데다 면허취소 처분을 받고도 3년이 지나면 재교부 신청이 가능해 구멍이 많다. 현행 의료법상 심의를 거쳐 면허 재교부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실이 확보한 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4~2023년 3월) 마약류관리법을 위반한 의사에 대해 면허취소 처분이 내려진 33건 중 재교부 승인 완료 건수는 11건이었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의료인 마약류 오남용과 연결될 수 있다는 이유로 셀프 처방 자체를 막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다. 캐나다·호주는 가족이나 의사 자신에게 마약류를 포함한 통제약물을 처방하거나 투여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영국은 자가처방 자체는 불법이 아니나 의학협회의 가이드라인을 통해 자가 및 가족처방 시 준수해야 할 사항을 규정해놓았다. 미국 역시 주에 따라 조금씩 규정 차이는 있으나 자가처방을 인정하돼 가족이나 의사 자신에게 처방을 금지하는 약물을 정해 관리하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최근 2023 국정감사 이슈와 관련해 의료인 마약류 자가처방 방지 방안을 언급하며 “마약류의 오남용 차단 실효성을 높이려면 의사의 처방 단계부터 환자의 마약류 투약 이력이 확인되도록 하는 방안의 실효성이 높아 보인다”며 “의료인 마약사범에 대한 처벌 기준 강화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