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핑퐁 외교의 전설' '냉혹한 현실주의자'…100세 일기로 떠난 키신저[뒷북 글로벌]

[키신저 前 美국무장관 타계]

10대때 나치 박해 피해 美로 이주

닉슨·포드 정권서 국무장관 역임

죽의 장막 열고 미소 긴장완화 초석

케네디~바이든 12명 대통령에 조언

베트남전 종전 견인해 노벨평화상

미중 갈등에도 시진핑 弔電 애도

한반도 긴장완화 '4자회담' 제안도

국제 컨설팅 회사 ‘키신저어소시에이츠’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 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2017년 10월 10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는 키신저 전 장관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국제 컨설팅 회사 ‘키신저어소시에이츠’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 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2017년 10월 10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는 키신저 전 장관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29일(현지 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그는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고 미소 데탕트(긴장 완화)를 이끌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한 ‘미국 외교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올 7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한 행보를 보여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학자에서 외교관으로 변신해 미국이 중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베트남전에서 탈출을 협상했으며 야망과 지성을 활용해 소련과 미국의 권력관계를 재편하고 때로는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기도 했던 키신저 전 장관이 그의 저택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1923년 독일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키신저 전 장관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1943년 미국으로 귀화했으며 미군에 입대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당시 유창한 독일어를 활용해 독일군의 정보를 감청,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공적을 세웠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훗날 외교관으로서 잊지 못할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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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후 하버드대에 입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국제정치학 교수 경력을 쌓고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합류했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그의 임무는 베트남전쟁 종전이었다. 그는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소련을 핵전쟁으로 위협해 북베트남을 협상장에 끌어들이는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으로 베트남전 평화협정 체결을 성사시켰다.
1970년대 세계 외교는 키신저 전 장관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1971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했고 이를 통해 이듬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과 미중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미중이 20여 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에 나선 역사적 순간으로 결국 미국과 중국은 1979년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올 7월 중국을 찾은 키신저 전 장관을 직접 만난 시 주석은 미중 관계가 악화된 상황 속에서도 “중국인들은 오랜 친구를 잊지 않는다”고 그를 치켜세웠다. 키신저 전 장관은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같은 해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또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를 추진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켰다.



그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도 눈을 감는 냉혹한 현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9년 6월 중국 톈안먼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의 입장을 ‘딜레마’라고 표현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동티모르 독립을 막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진압을 묵인했다는 지적 또한 있다.

그는 한반도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1975년 9월 제30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2011년 발간한 저서 ‘중국에 관해(On China)’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비화가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 직전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승인한 것은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 외곽에 둔다’고 기록한 미국의 극비 문서를 소련이 입수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 출범으로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저술과 강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82년 컨설팅 회사인 키신저어소시에이츠(Kissinger Associates)를 설립했으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애틀랜틱카운슬 등 미 유명 싱크탱크 멤버로 활동했다. 2014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세계 질서’에는 점점 분열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관점이 담겨 있다. 영원한 현실주의자로 불리는 그는 100세가 돼서도 현실 세계에 대한 냉철한 안목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올해 생일을 맞아 진행된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이 가장 협력해야 할 분야로 인공지능(AI)을 꼽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시 주석이 직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조전(弔電)을 보내 깊은 애도를 표했다. 시 주석은 “헨리 키신저 박사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략가이자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오랜 친구), 하오펑유(좋은 친구)”라며 “반세기 전에 그는 탁월한 전략적 안목으로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역사적인 공헌을 했고 이는 양국에 이익이 됐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꿨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1971∼1972년 미중 관계 정상화 과정에 앞장선 키신저 전 장관을 대우해왔다.

한편 아산정책연구원은 정몽준 명예이사장과 생전 각별한 관계를 이어온 키신저 전 장관이 별세한 데 대해 “키신저 박사는 한국 국민의 평생 친구였으며 우리는 키신저 박사와 그분의 현명한 조언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어 “키신저 박사는 외교정책 수립 과정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역사와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제 관계를 봤다”고 말했다.


워싱턴=윤홍우 특파원·베이징=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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