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바이오업계의 오랜 숙원인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혁신위)가 출범을 앞두고 있지만 구체적인 역할도 이를 뒷받침할 예산도 여전히 깜깜이 속이다. 당초 정부는 지난 8월 혁신위 출범을 공언했는데 10월에야 설립 근거인 대통령 훈령이 마련됐다. 11월 중 혁신위 출범과 동시에 열기로 했던 킥오프 회의도 현재로서는 언제 열릴지 미지수다.
1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혁신위는 위원 위촉은 물론 출범 시기조차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부처 한 관계자는 “국무총리실과의 협의 및 위원 위촉 등이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10월 17일 보도자료에서 “11월 중 1차 회의를 열고 시급한 안건부터 논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무위로 돌아간 셈이다.
혁신위가 출범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크다. 바이오 헬스분야 정책 조정과 규제, 인력 등 범부처 컨트롤타워 역할을 규정할 구체적인 법적 기반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탓이다. 정부는 지난달 보건산업진흥원에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을 위한 법적 기반 강화 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정부는 용역제안요청서에 “제약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 관련 법률이 있지만 별도의 법 제정이 필요하다”며 ‘바이오헬스 혁신법(가칭)’에 대한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바이오헬스 혁신 거버넌스 정비 방안 △규제혁신 시스템 마련 △인력양성, 연구개발, 수출 지원 △바이오헬스 혁신에 필요한 법제화 등을 담은 보고서를 내년 3월 말까지 관계부처에 제출해야 한다.
내년 1분기 바이오헬스 혁신 법안의 윤곽이 나와도 국회 문턱을 언제 통과할지 점치기 어렵다. 내년 4월 총선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앞두고 있는 만큼 여야 역학관계에 따라 법안이 무기한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2025년도 바이오 관련 연구개발(R&D) 예산 역시 개별 부처가 수립하고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심의·확정되는 전례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혁신위의 구상대로 예산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혁신위의 행보도 힘이 딸릴 수 밖에 없다. 중앙부처 관계자는 “각 부처를 총괄할 수 있는 상위법이 없으면 과거 같은 방식대로 업무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며 “관련 법 마련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유사 위원회 구조조정…"혁신위에 권한 몰아줘야"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7월 열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2020년까지 바이오 7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자문회의는 국가전략의 실효성 있는 추진을 위해 부처·분야를 초월한 종합조정기구인 (가칭)‘바이오전략위원회’ 설립 및 바이오 미래전략 추진으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2020년 50개의 세계적 기술혁신 바이오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2019년 5월 22일 ‘바이오헬스 국가비전 선포식’을 열고 2030년까지 제약·의료기기 세계시장 점유율 6%, 500억 달러 수출, 5대 수출 주력산업 육성이라는 목표를 내놓았다. 하지만 역대 정부의 바이오 육성 정책은 모두 희망고문으로 결론이 났다.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혁신위)가 출범을 준비 중인 가운데 30일 정부 부처와 관련 업계 안팎에서는 컨트롤타워인 혁신위가 힘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구체적인 역할 정립과 이를 뒷받침할 예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역대 정부가 숫자 부풀리기식으로 장밋빛 비전을 제시했던 것과 달리 K바이오의 현실에 맞는 전략적인 육성 정책과 수요자 맞춤식 액션플랜이 마련되야 한다고 조언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보건산업진흥원에 발주한 ‘바이오헬스 산업혁신을 위한 법적기반 강화 방안 연구용역’ 제안요청서에는 바이오헬스 혁신 거버넌스 정비방안이 주요 과제로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은 혁신위가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로 기존에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각종 위원회의 역할을 재정립하거나 구조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미 과학기술자문회의 산하에는 2016년 설립된 ‘바이오특별위원회’가 바이오 분야 범부처 연구개발(R&D) 정책을 총괄·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각 부처 1급이상 공무원으로 구성된 정부위원(9명)과 바이오 업체 대표, 의료계 전문가, 대학교수 등 민간위원(14명) 등으로 꾸려져 혁신위와 인력구성도 비슷하다. 이번 혁신위에서 위원장이 국무총리로, 정부위원이 각 부처의 장관으로 각각 격상된 정도만 다르다.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인 생명의료전문위원회도 바이오특위와 상황이 비슷하다.
보건산업진흥원은 보고서에서 “바이오특별위원회의 기능과 유사한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와 경제관계장관회의가 별도로 설치·운영되고 있어 기능이 중복 발생하고 일원화된 정책 조정을 담보하기 어렵다”며 “각 부처마다 정책심의위원회에서 산발적이고 경쟁적으로 바이오헬스 분야 육성 정책을 펴고 있어서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혁신위가 정부부처 내 또 다른 위원회인 ‘옥상옥’ 기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각종 위원회와의 역할 분담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부처 이기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통합 거버넌스를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각 부처가 부처 이기주의에 매몰돼 예산과 규제, 인력 등으로 밥그릇 싸움을 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강력한 정책조정 권한을 갖지 않으면 다른 위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며 “그린 바이오에서부터 화이트 바이오, 레드 바이오에 이르기까지 중장기 로드맵을 크게 그릴 수 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역대 정부의 실패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바이오 육성 정책의 청사진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2월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을 발표하며 2027년까지 연매출 1조원 이상의 블록버스터 신약 2개를 개발하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출을 2배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라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1조원 이상 매출을 기록한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는 단 8곳에 불과하다.
제약업체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은 정부가 말만 요란할 뿐 실제 지원은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며 “혁신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업계의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