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크게 깎이면서 대학·정부출연연구원·벤처기업 연구 현장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미래 성장 동력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산학연 곳곳에서 연구협약 변경 작업이 한창으로 기존 연구 중단이나 감축, 신규 예산 확보 애로, 이공계 대학원 약화 등 고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좀비 과제’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을 일률적으로 축소하는 경우도 흔하다. 중소벤처기업부의 일률적 예산 삭감 대상으로 통보받은 벤처기업만 4000곳 이상이다. 중기부는 궁여지책으로 R&D 예산의 전액 인건비 전용을 허용하기로 했다. 올해 R&D 예산은 26조 5000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14.7% 감소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한 40대 연구단장은 소셜미디어에 “과학자로 살면서 처음으로 ‘자살 충동’이 일어났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경제안보 환경의 급변과 기술 패권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 혁신 없이는 경제성장도, 안보도, 삶의 질도 담보할 수 없다. 경제의 기초체력인 잠재성장률조차 올해 1.7%까지 하락할 것이라는 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예측이다.
대통령실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빠른 추격자(패스트팔로어)에서 벗어나 선도자(퍼스트무버)로 나아가기 위해 R&D 수주 경쟁을 강화하고 국제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국제 R&D, 인공지능, 우주항공, 양자기술 등은 예산을 늘리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인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2017년 펴낸 ‘경제철학의 전환’에서 “R&D 예산 지원제도는 시대에 맞지 않다. 성과가 없고 관리도 미흡하다”며 “정부는 기초연구와 우주항공 등 민간의 R&D 투자가 어렵고 불확실성이 큰 과제에만 집중해야 한다. 최소한 (R&D) 예산의 20% 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연구 현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전면적인 ‘R&D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한다. 뿌려 주기 식 R&D에서 벗어나 ‘R&D다운 R&D’를 표방하며 33년 만에 처음으로 R&D 예산을 깎았던 그 결기를 살려야 한다. 예산만 삭감하고 R&D 생태계를 혁신하지 않으면 자칫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도 있다. 지난해 6월 말 대통령의 ‘R&D 카르텔’ 지적 이후 정부가 대통령실, 연구 현장과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역설적으로 R&D 구조 개혁에 매진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우선 기획재정부·과기정통부·교육부·중기부·국방부 등 각 부처가 R&D 현장을 통제하는 식의 관료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히 기재부는 출연연들을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타 공공기관으로 묶어 인건비·경상비 등 예산과 정원은 물론 연구 분야까지 규제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2022년 주요 출연연들을 순회하며 ‘국가연구소 기업가정신 토크콘서트’를 할 때 “R&D 투자 재량권을 주면 못했던 연구의 절반 이상을 더 할 수 있다”는 호소가 쏟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2021·2022년 전국 주요 대학을 돌며 토크콘서트를 할 때도 연구 현장에서 과도한 행정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구비를 상황에 따라 이월시켜 쓸 수도 없을 정도로 경직된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힘들다. R&D 심사의 상피제(연구자와 같은 학교·기관 평가자 배척) 같은 구시대적 요소도 많다.
다행히 조만간 대통령실에 과학기술수석실이 신설된다. 과기수석은 정말로 부처 간 장벽을 허물고 범부처 중복 R&D 예산을 조정해 융합·혁신을 촉진하는 데 총대를 메야 한다. 연구 현장의 자율성·창의성 보장과 선도연구 독려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이공계 연구 생태계 위축에도 적극 대처해야 한다. 1조 8000억 원대로 3.5배나 늘어난 국제 R&D 협력도 본말이 전도되지 않게 잘 살펴야 한다. 이제는 ‘노동·연금·교육’이라는 3대 구조 개혁에 R&D 구조 개혁을 추가해 혁신과 역동성을 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도자의 꿈은 요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