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근무하던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보라매’ 관련 내부자료를 유출하려다가 적발됐다. 아직은 핵심 기술 유출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상당한 분량의 자료를 빼내려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위사업청 등에 따르면 경남 사천의 KAI 본사 정문 검색대에서 KF-21 개발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국영기업 소속 연구원 A 씨가 개발 과정 등 다수의 자료가 담긴 미인가 이동식저장장치(USB)를여러 개를 갖고 외부로 나가려다가 지난달 17일 적발됐다. 유출하려고 했던 USB에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자료가 담겨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KAI 관계자는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회사 밖으로 나갈 때 검색대에서 적발됐다”며 “국정원과 방사청, 방첩사 등에 통보했고 현재 조사기관에서 조사가 진행 중인데 현재까지는 핵심 기술 등 국가 기밀이 유출된 정황은 없다”고 말했다.
국가정보원과 국군방첩사령부, 방위사업청 등으로 구성된 합조사팀은 이들이 유출하려고 했던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해당 기술자는 현재 출국이 금지된 상태다.
美 승인 자료 유출 정황…외교 문제 우려
방사청 관계자는 “KF-21 인도네시아 인원(기술자)에 의한 기술 유출 관련 정황에 대해서는 현재 국정원을 포함한 관계기관이 합동조사 중”이라며 “조사결과가 나와봐야 세부사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에 적발된 USB메모리 자료 중에는 KF-21 개발과 관련해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의 ‘수출 승인(E/L)’ 관련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자칫 한미 간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적발된 USB메모리에 담긴 49종 자료 중 하나로 논란이 되는 이유는 KF-21 개발에는 미국으로부터 수출 승인을 받은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사의 기술 등이 적용됐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이를 인도네시아 정부와 공유하려면 미국으로부터 다시 별도 수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자료가 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적발된 USB메모리 자료에 포함된 것만으로도 미 정부가 우리에게 항의할 빌미가 된다.
그런데 정부가 과도한 대응을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KAI 관계자는 “현재까지 군사기밀이나 방위산업기술보호법에 저촉되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일반자료가 다수인 것으로 안다”며 논란 확대에 선을 그었다.
정부의 한 소식통도 “(인도네시아 기술자들이 유출하려고 했던 자료 중) 전략 기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내용을 분석해서 심각한 자료가 있는지 다시 보는 단계”라고 답했다.
이처럼 정부가 기술유출 시도 논란 확대에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이번 사건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뿐 아니라 향후 전투기 개발 일정과 수출 등에 차질이 있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일이 한미 간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여지가 충분하다. 적발된 자료는 수출 승인 기술 관련 표지로 세부 내용이 담겼다. 주목할 점은 우리 정부는 이를 미 국무부 산하 국방교육통제국에 지난달 30일에 부랴부랴 신고했다. 미 정부에 알리지 않을 경우 미 정부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판단에서다.
정보당국, 고의 유출·내부 공모 여부 조사
이 사업이 추진되던 2015년 록히드마틴사 등 미 측은 이미 기술 이전에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제 3국으로의 기술 유출 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당시의 우려가 현실화 된 것이 아니라고 서둘러 수습해야 향후 미국으로부터의 전략무기 수출에 영향이 미치는 것을 차단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특히 보안에 가장 엄격해야 할 방산업체 내부에 미인가 USB메모리가 반입된 것 자체를 미국 측이 문제 삼을 가능성에 정부로서는 부담이 컸다는 후문이다. 한 방산업체 관계자는 “이번에 적발된 자료에 미 정부의 수출 승인 관련 내용이 미 정부가 인도네시아에 공유하지 않도록 한 내용이라면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인도네시아의 분담금 문제 보다는 미국의 눈치보기가 더 급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정보당국은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고의로 유출을 시도했는지, 내부 공모자가 있는 지에 대해서 확인 중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인도네시아와 공동 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 차원에서 과도한 대응은 자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방사청은 “인도네시아 기술자가 확보한 KF-21 기술 자료 중에 전투기의 눈에 해당하는 AESA 레이더 등 항전 장비가 포함됐다는 보도가 일부 매체에서 나오고 있는데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 관계자도 “현재까지 군사기밀이나 방위산업기술보호법에 저촉될 만한 내용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선을 그었다. 기밀이라 할 만한 핵심 기술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분담금을 1조 원가량 연체해 논란이 되는 상황에서 이번 일로 양국 협력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에 이번 사건에 대해 군 당국이 쉬쉬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 기술만 탈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반면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역시 군사기밀 등에 해당하는 내용은 USB메모리에 없었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번 기술 유출 시도가 KF-21 사업 일정 즉, 공동 개발 무산과 향후 KF-21 수출 과정에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는 모습이다.
정부는 ‘로키(low key) 모드’ 대응 분위기
방산 관련 정보전에서 발생한 외교적 비화가 다시 오르내리는 것을 차단하는 정부의 의지도 감지되고 있다. 13년 전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국정원 요원의 침입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도네시아는 형식적인 유감 표명을 했을 뿐, 자국에선 ‘별일 아닌 오해’라고 적극 진화하기도 했다. ‘T-50 수출 성사’를 위해 인도네시아 측 협상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여섯째로 큰 교역국인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확전을 자제했다는 관측이 있었다. 결국 숙소 침입 사건 몇 달 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T-50 16대(4억달러) 수출을 최종 계약했다. 이번에는 거꾸로 우리 정부가 ‘로키(low key) 모드’ 대응으로 대처하는 분위기다.
KF-21은 총개발비 8조원대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2016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시제기 1대와 일부 기술을 이전받고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48대를 생산하는 조건으로 사업비의 약 20%인 약 1조7000억 원(이후 사업비 조정으로 1조6000억 원으로 감액)을 2026년까지 부담키로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현재까지 분담금 1조원 가량을 내지 않은 상태다.